반딧불과 촛불
반딧불과 촛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1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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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나라의 차윤(車胤)은 호롱불에 사용할 기름 구할 돈이 없어서 여름이면 수십 마리의 반딧불을 주머니에 담아 그 불빛으로 밤새워 책을 읽었다. 나중에 그는 과거에 급제했고 이부상서란 고위 벼슬까지 올랐다. 이런 고사(故事)에서 비롯돼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함’을 일컫는 말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한자성어가 생겼다.

청빈한 선비가 입신(立身)하는 과정에서 호롱불을 사용할 형편이 못 돼 ‘눈(雪)과 반딧불(螢)’을 이용했다는 고사는 인간과 자연을 융합해 놓은 측면도 있다. 달빛도 있고 아궁이 불도 있을텐데 왜 하필이면 형설이었을까. 눈과 반딧불은 소리가 없다. 천둥, 번개치며 내리는 눈은 없고 ‘앵앵’거리거나 ‘씽씽’ 날아다니는 반딧불 얘기는 더욱 들어 본적이 없다. 눈은 밤새 소리 없이 내리고 반딧불은 여름 밤하늘을 수놓을 뿐이다. 특히 반딧불은 가까운 거리에서 인간이 쫓아오게 하고 풀밭을, 제방뚝을, 골목어귀를 뛰어다니게 만들지만 항상 고요하다.

밤하늘 허공을 헤집어 펄쩍 펄쩍 뛰어오르고 덤불 사이로 손을 내밀다 가시에 찔려도 다시 ‘형광 불빛’을 찾아 쫓아가는 것이 인간이란 것도 깨닫게 한다. 반딧불은 주위를 요란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어릴 적 추억을 더듬어 봐도 여럿이 한꺼번에 반딧불을 잡으러 뛰어 들었던 기억은 없다. 동네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 허걱대며 돌아다녔던 생각은 나지만 좌충우돌 부딪힌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고독한 인간이 자신과 비슷한 자연속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에 심취하며 공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으면 반딧불이 된다’는 말도 인간영혼 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형광물질’을 순수자연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촛불은 반딧불과 다른 점이 많다.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본성만 봐도 의지적이고 희생적인 측면이 강하다. 자연과는 한 걸음 비켜서 있으면서 역동적인 생명감을 표출할 때도 있다. 제례 의식을 행하거나 기도할 때, 촛불은 정(淨)적인 요소로 작용하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동(動)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꺼질 듯 이어지는 생명력은 저항적 의미와 함께 지속성도 내포한다. 그만큼 폭발력도 수반된다. ‘불같은 성질’이란 상투어나 한 때 한국 전통가옥이었던 초가집을 일순간에 소실케 한 것이 촛불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일렁이는 촛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는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인다. 뚜렷한 이목구비 없이 동일한 모습으로 표시되는 그림자는 불빛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특허품 중 하나다. 촛불이 있는 성탄절, 석가탄신일, 집회, 시위가 어둠 속에서 더욱 찬란해 보이는 것도 촛불이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그것이 주는 따스함은 마음을 열게 하고 들뜨게 하며 불빛에 비친 상대의 모습과 자신이 동일함을 느낄 때 동지애로 격상되는 것이다.

소리가 없기는 촛불도 반딧불과 마찬가지다. 굉장한 굉음을 내며 꺼지는 것도 아니고 이글거리며 불타지도 않지만 눈물을 흘리듯 살다가 일순간 사라진다.

작금에 시작된 장맛비가 유월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시위를 잠시 주춤하게 할 듯하다. 같은 그림자 속에 묻혀 저항했던 촛불들은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일까. 울산시가 오는 20일부터 9일 간 ‘반딧불이 시민체험’행사를 울산 대공원, 들꽃 학습원 일원에서 개최한다고 한다. 순수 자연을 상징하는 반딧불이 ‘역동의 산업수도’ 울산 들판 곳곳에 자연과 인간을 전했으면 한다. / 정종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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