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천국
커피 천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8.18 19: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찜통 속이 이리 뜨거울까. 입추가 지나도 폭염의 기세가 수그러들 줄 모른다. 문득 도시사람들은 어디에서 더위를 피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통계치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짐작하건데 도심 속 피서지는 커피전문점이라고 본다. 올여름 널리고 널린 커피숍에 손님들이 넘쳐서 몇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곳은 깊고 진한 커피 향과 쾌적한 에어컨 바람 때문에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커피나 팥빙수를 사람수대로 다 시키지 않아도 눈치 보지 않고 무한수다를 떨며 여름나기 좋은 곳. 우후죽순처럼 커피전문점이 성업 중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SUDA’라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원래 그 자리는 구멍가게만한 동네슈퍼였다. 건물 주인이 십여년 넘게 하다가 아니 버티다가 주위에 하나둘 편의점이 생기고 제법 큰 마트가 들어서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 장소도 장소지만 이름 있는 프렌차이즈 커피 전문점도 아니어서 파리나 날리지 않을까, 지나칠 때마다 오지랖 넓은 생각을 했다.

내 어쭙잖은 기우와 달리 이 카페엔 손님이 제법 들었다. 낮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 후에도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가벼운 차림으로 그 곳에 속속 모여들었다. 맥주와 간단한 안주, 커피에 팥빙수까지 시원한 메뉴들이 날씨와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가격 또한 착하다고 소문이 났다. 덤으로 따라오는 빵빵한 에어컨 바람은 쉽게 지갑을 열게 만든다. 골목에 자리 잡은 커피숍은 마치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의 그늘막 같은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중이다.

전망이 좋거나 몫 좋은 장소는 대부분 커피전문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동강병원 뒤쪽 도로엔 태화강을 끼고 커피타운이 조성되었다. 웬만한 식당과 술집보다 커피 전문점이 화려한 인테리어로 더위에 지친 도시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뜻밖의 장소에도 커피열풍이 대단하다. 며칠 전 병문안 차 종합병원에 들른 적이 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테이크아웃 커피숍이 눈에 띄었다. 로비에서부터 익숙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고 커피 향은 병원의 모든 잡냄새를 잠식시켰다. 약속이나 한 듯 일행은 커피를 사서 환자와 함께 보약처럼 음미했다.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사서 문병을 하고 오는 시대이니….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을 넘어 커피 천국이 된 듯하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기 마련. 그래서인지 모임이 있으면 밥을 먹고 2차는 카페행이 주를 이룬다. 예전엔 노래방을 가서 노래 부르는 게 대세였다면 이제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밤이면 술집만큼 커피전문점이 불야성을 이룬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은 천사 같은 커피전문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대학가 근처 커피숍은 아예 도서관을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다.

노트북이나 패드를 펼치고 과제를 한다든지 조별 스터디도 커피숍에서 이루어진다. 새댁들이 아이를 데려와서 모임을 하거나 총각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는 게 더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커피의 마력에 도시인들은 시간과 공간을 점령당하는 셈이다.

한때 외국계열 커피전문점이 들어오면서 커피 값이 비싸졌다. 물론 한국인을 봉으로 여기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가 있긴 했지만 커피값은 남자들이 즐겨 마시는 술값보다 훨씬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커피의 치명적 매력은 각성성분에 있지 않나 싶다. 잠이 덜 깬 아침나절이나 나른한 오후에 마시는 커피 한잔은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기운을 북돋아 준다. 오죽했으면 중세시대의 유럽에선 커피 향을 악마의 향기라고 했을까.

커피와 여자는 역사적으로도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한다. 14세기경 터키는 남편이 아내에게 하루 할당량의 커피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혼의 사유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커피가 여자에게 가정의 주도권을 쥐게 하는 묘약이었다니 커피를 마시면서 괜히 우쭐해진다.

어쨌든 자연현상에 따라 폭염은 곧 기세를 누그러뜨릴 것이다. 열섬이 돼 버린 도시 한복판과 골목까지 잠식한 커피전문점의 기세는 언제 꺾이며 가을이 오면 또 어떤 천국이 나타나 우리의 입과 눈을 즐겁게 해 줄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 못 드는 밤, 아이스커피 한잔을 마시며 열대야를 식혀본다.

<박종임 수필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