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그림쟁이
천재 그림쟁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8.11 1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 지는 서녘 하늘, 진홍색으로 물든 세상이 어둠이 오기전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발하며 한껏 곱다. 아름다움에도 결연함이 있다면 그건 분명 타는 노을일 것이다. 마른장마가 계속돼서일까 유난히 타는 빛이다.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보는 내 눈에 어느덧 글썽 물기가 어린다. 모든 사라지는 것의 비장함에서 오는 안타까움 때문인 것 같다. 만지면 붉은 핏물이 묻어날 것만 같은 석양은 넓게 펼쳐진 구름을 적시고 마음을 적신다.

구름은, 아니 바람은 언제 저토록 신비로운 그림들을 그려 놓았을까. 점점 멀리 퍼지는 노을을 따라 기기묘묘하게 다른 구름의 형상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아침 산책길에서 보았던 여명과는 또 다르게 다가오는 서늘한 느낌은, 금방 사라지고 말 대상이 지닌 서글픔 때문인가.

행여 귀한 장면을 놓칠 새라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꺼낸다.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오로지 이순간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기막힌 바람의 명작을 찰칵찰칵 폰 속에 담는 마음은 제법 큰 부자가 된 듯하다. 사방팔방 어느 곳에 렌즈를 들이대도 모두가 그대로 한 폭의 비경이다. 늘 부담스럽게 여겨지던 디지털의 디테일한 기능이 이때만큼은 정말 고맙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겨놓기 위해서 오랜 시간 열정을 기울이고 공을 들인다. 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바람이야말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적인 그림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람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드넓은 하늘을 화려하게 바꾸어 놓는 기막힌 재주가 있다. 막힘없이 한계를 넘나드는 바람이야 말로 진정 천재 그림쟁이다.

저의 재주를 알아봐 주는 것이 즐겁기라도 한 듯 갑자기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날리고 옷자락을 당긴다. 나도 바람처럼 누군가의 머리털을 거침없이 당겨도 보고 옷자락을 날려 보고도 싶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바람의 무등을 타고 한바탕 바람의 춤을 추고도 싶다. 통쾌한 웃음을 마음껏 공중으로 날리면서 말이다. 철부지적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바람이 자꾸만 부추긴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걷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은 어느새 한 숟갈 듬뿍 떠먹고 싶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몽실몽실 그려 놓았다. 그 옆에는 손오공이 타고 다녔을 법한 둥그런 멍석 구름이 유유자적하다. 양옆으로는 새떼가, 돛단배가, 선녀의 옷자락이 하늘하늘 한가롭다.

늘상 도리 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구름은 애타는 그리움이다.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설레임이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더욱 바빠진다.

구름은 바람의 질료다. 돈 안들이고도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는 천혜의 자원이다. 그렇게 멋진 재료를 가지고 마음껏 그려내는 바람만의 노래. 구름은 언제라도 바람의 창작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긴다. 부지런한 바람은 날이면 날마다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니 천재가 안 되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날마다 만들어내는 새로운 작품들은 바람의 삶이고 유쾌한 터뜨림이다.

산꼭대기에 서 있는 풍차를 종횡무진 돌리던 바람이 드넓은 벌판으로 내닫는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논밭의 곡식들에게로 냅다 달려간 바람이 무더기로 벼의 허리를 껴안는다. 느닷없는 바람의 기세에 놀란 벼들이 한 방향으로 쓰러진다. 키 큰 옥수숫대가 우줄우줄 춤을 춘다. 바람의 키가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새로운 음계를 만들어 낸다.

벼이삭 끝에 매달려 있던 고추잠자리 여린 몸이 덩달아 흔들린다. 꼬마 아이가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휙 뿌리치더니 살금살금 풀잎 끝 잠자리 앞으로 손을 뻗는다. 살짝 졸음에 겨워 있던 잠자리 날개가 아슬아슬 꼬마의 손끝에 매달려 나온다. 아이의 팔랑이는 머릿결과 짧은 옷자락이 나풀나풀 나비 같다.

아이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다시 화판으로 옮긴다. 요술 화판에는 아까는 없었던 기막힌 명화가 소리도 없이 걸려 있다. 그 위로 서서히 덮여오는 그늘. 이 바람의 저녁이 만들어내는 황홀경에 빠진 시간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전해선 수필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