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맛’에 빠지다
‘칼 맛’에 빠지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7.0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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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을 하기 전 필자는 손목이나 발목을 가볍게 돌리거나 제자리에서 몇 차례 뜀뛰기를 한 후 빠른 걸음으로 걷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뛸 만큼의 거리를 정하고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이때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거리를 설정하면 그 목표량을 채우기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달성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목판화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장르의 예술 중에 특히 목판화는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정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따릅니다. 마치 쉼 없이 달려가야 하는 마라톤과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에서 참여 작가이면서 큐레이터의 역할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일본, 미국, 한국의 목판화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뛰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벅차고 차오르는 존경심에 때로는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목판화는 크게, 그리고, 파고, 찍는 세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무판에 그려진 이미지를 조각칼로 파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위치에 여러 번 정교하게 찍어나가는 기술은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인 수제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작품이 탄생되기까지 엄청난 인내와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런 이유로 목판화 인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목판화 인구가 많지 않은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렇게 공 들여 마친 작업의 제 가치를 대중이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판화는 서서하는 작업이 대부분입니다. 앞에서 말한 세 과정 모두 어느 하나 빨리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작품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서 있어야하는 시간도 늘어납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서서, 파고, 찍고를 반복하다보면 정말이지 진이 빠질 대로 빠져버립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판에 묻어있는 잉크를 천으로 문질러 닦아내야하고 롤러와 테이블에 펼쳐진 잉크도 모두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사이즈가 커질수록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하게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목판화 페스티벌의 가치는 사실 산출하기 힘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국제행사가 울산이라는 산업도시에서 개최된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 교육부에서 대학생들의 취업률을 잣대로 결과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회화과나 문예창작과 등을 없애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예술이나 문학 관련학과는 제외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이제 우리 모두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서양화과 수업의 한 과정으로 목판화를 처음 접했습니다. 교수님의 ‘칼 맛이 좋다’라는 칭찬 한마디가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칼 맛’이란 한번 시작된 이상 그만둘 수 없는 오묘하면서도 근사한 맛이더군요.

열정을 안고 순간순간을 이겨나가다 보면 주변의 시선이나 상황이야 어찌됐든 언젠가 함께 뛰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도 ‘칼 맛’ 한번 느껴보시겠어요?

<이하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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