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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이번 구월엔 프랑스 클래식을 들어보는 것도
2023. 09. 06 by 울산제일일보

영영 가실 것 같지 않았던 찜통더위도 구월이 되니 ‘언제 그랬었나?’ 수그러들었다. 이젠 조석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폐부(肺腑)를 적시는, 살 만한 계절이 됐다. 이맘때쯤이면 친한 우인이 보내주는 이미지가 한 컷 있다. 여름은 매미로 상징되는 락(rock) 음악의 계절인데, 가을은 귀뚜라미로 재즈(jazz)의 계절임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나름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십여 년 오디오파일(Audiophile, 오디오 애호가) 생활을 한 필자는 가을은 재즈도 좋지만 클래식 음악이 더 제격인 계절이라 생각한다. 한층 아름다워지고 명료해진 자연과 더욱 어울리는 게 클래식 음악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오디오파일일 때는 베토벤이나 멘델스존, 바그너와 같은 독일 음악가의 곡에 심취했었다. 수천만 원대 고가의 하이파이 스테레오 시스템에서 듣기에 제격이었다. 주로 대편성의 교향곡을 즐겨 들었는데, 스피커를 적당히 벌려 놓고 어느 지점에 앉아야 악기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는가에 집중했었다. 그러니까 오보에는 무대 오른편 중간에서 들리고 호른은 무대 왼쪽 뒤편에서 들려야 했다.

필자가 오디오파일을 접은 이후 오디오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CD와 LP가 사라졌다. 요즘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음원을 다운받아 듣고 있다. 너무 쉽게 음악을 듣게 되니 음악 감상에 대한 진지함이랄까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음악을 스마트폰이나 블루투스 스피커같이 무지향, 음장감 위주의 기구를 통해 듣는다. 그러다 보니 집중하지 않고 들어도 되는 편안한 음악을 주로 듣게 된다.

여기에 딱 어울리는 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프랑스 음악가들의 곡들이다. 가브리엘 포레(1845~1924), 클로드 드뷔시(1862~1918), 에릭 사티(1866~1925)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음악의 상당수가 커피를 마시며 다른 작업을 하면서 듣기에 제격이다. 즉 부담감 없이 집중 안 하고도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이 많다. 물론 드뷔시의 ‘La Mer’ 같이 스케일이 큰 곡도 다수 있긴 하다.

불과 백여 년 전의 프랑스 음악가들을 알아가다 보니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세세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부산물로 얻게 된다. 이야기는 가브리엘 포레로부터 시작된다. 포레가 어느 재력가 집안의 음악 가정교사로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포레가 그 집의 부인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엠마 바르딕’과 눈이 맞아 연분(緣分)이 난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애정행각을 벌였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포레가 엠마의 딸인 엘린(별명이 ‘돌리’)을 자신의 딸인 양 몹시 귀여워했으며, 돌리를 위해 여러 곡을 작곡했다고 하는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이 곡들이 모여서 ‘돌리 모음곡’이 되었다.

포레보다 좀 더 우리한테 잘 알려진 클로드 드뷔시도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음악가였나 보다. 드뷔시 역시 포레의 옛 연인인 엠마 바르딕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둘 다 가정을 가진 유부남과 유부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영국으로 도피행각까지 벌였다고 한다. 이때 작곡한 곡이 ‘기쁨의 섬’이라고 한다. 심지어 이들은 도피 생활 중에 ‘슈슈’라는 애칭을 가진 딸도 낳았다고 하니 막장드라마의 끝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세간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드뷔시는 딸 슈슈를 위해 ‘어린이 정경’이란 곡을 남겼고, 지금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포레와 드뷔시가 사랑했던 여인, 엠마 바르딕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놀랍게도 많은 사진들이 검색된다. 흐릿한 흑백사진이지만 미모가 꽤 있어 보인다. 위대한 두 음악가의 애간장을 녹일만한가에 대해선 물음표지만, 이는 실물을 영접하기 전에는 속단하면 안 된다. 아무튼 불과 백여 년 전에, 감정에 충실하게 살며 이를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킨 프랑스 거장들이 대단하기도 하고, 한편 부럽기도 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가 아니더라도 가로수가 울창한 도심의 길거리 카페에 앉아 에릭 사티의 ‘Je te veux(그대를 원해)’를 들으며 프렌치프레스로 추출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다소 텁텁하나 풍부한 향을 느끼며 백여 년 전 그들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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