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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와인, 참 어렵네
2023. 05. 03 by 울산제일일보

몇 년 전, 강릉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캠퍼스 주변엔 수령이 백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해송(海松)이 울창했고 그 사이로 캠퍼스건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이런 운치를 ‘확’ 깨는 인조물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캠퍼스 옆에 자리한 모 소주회사의 높다란 저장탱크였다.

동행한 지인이 느닷없이 물어온다. “술 좋아하는 전 박사님, 그동안 마신 술을 모두 합치면 저 탱크 하나 정도는 되지 않겠어요?”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계산을 해 봤다. 소주 말고도 맥주, 막걸리도 자주 마시고 거의 매일 40년을 넘게 마셨으니 대충 계산해 봐도 [1L/일 x 365일 x 40년 = 1만4천600 L]라는 적지 않은 수치가 나왔다. 웬만한 소형 유조차 한 대 분량은 마신 것 같다.

꼬리를 물고 좀 더 생각을 해봤다. 그동안 주로 마신 술의 종류를 상기해봤다. 생각할 것도 없이 소주가 90%는 될 것 같고 그 뒤를 이어 맥주, 막걸리, 위스키, 고량주, 와인 순이었다. ‘인생은 유한하고 마실 술은 널려 있는데 허구한 날 소주만 마시는 게 말이 되나?’라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앞으로는 다양한 술, 좀 더 좋은 술을 마셔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첫 단계로 접근이 용이한 와인에 도전하기로 했다.

일단 동네 마트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중저가의 와인들을 두서없이 시음해봤다. 두어 달 이 짓을 하다 보니 내 입에 맞는 와인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주에 인이 박혀서인지 바디감이 있고 탄닌 맛도 강한 아르헨티나 말백과 칠레 쉬라즈 레드와인이 입에 착착 감긴다. 와인에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에는 와인에 대해 학술적으로 공부해 봤다. 와인이 언제 어디서 태생해서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와인엔 어떤 종류가 있고 어떤 품종이 있는지, 떼루아(terroir)와 빈티지(vintage)는 뭘 의미하는지, 와인 보관법과 와인을 마시는 예절, 어울리는 음식 등등. 공부를 하면서 와인샵도 넓혀가며 다양한 종류의 와인에 도전했다. 이때부터 어려움이 시작됐다.

일단 와인은 종류가 너무 많고, 같은 품종의 와인이라 해도 떼루아와 빈티지에 따라 맛과 향의 차이가 컸다. 나름 와인에 꽂혀서 차 트렁크에 와인을 여러 병 싣고 다녔다. 한번은 무더운 여름날, 운동 후 고깃집에서 칠레 쉬라즈를 오픈했는데, ‘아뿔싸! 와인이 뜨끈하면서 시큼한 게 아닌가.’ 불량품인가 싶어 이탈리아 아마로네 와인을 오픈했더니, 역시 똑같았다. 냉동실에서 20여 분 식혀도 매한가지였다. 이렇듯 와인은 예민했고, 덕분에 어려움은 계속됐다.

와인을 포기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간의 공(功)이 아까워 좀 더 해보기로 했다. 이번엔 급을 올려 프랑스 프리미엄 와인과 캘리포니아 나파 와인에도 도전해봤고, 여러 종류의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에도 도전해봤다. 도전을 할수록 와인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배가 산으로 가는 듯했다. 공학도 아니랄까봐 매번 와인의 향과 맛을 분석하고 종류별로 등급을 매기는 게 몸에 밴 탓이리라.

이런 고민을 어느 정도 해소해준 건 생뚱맞게도 우연히 접한 어느 여류시인의 시조였다. ‘오래 묵었다는 말은 상처가 많다는 말/ 나를 알고 있다고 가볍게 흔들지 마/ 조심은 소중하다는 것 쉽게 깨진 투명한 맘…’ 와인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오롯이 오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부딪치는 소리마다 맑은 울음 토하지만/ 이것만 읽어줘 너에게 물든 내 숨결/ 조용한 흔들림 속에 숙성된 향기를…’ 와인은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나누는 것이지, 분석하고 등급을 매기는 게 아니다. ‘요란한 웃음소리 조용한 속삭임도/ 언제든 부르면 달려가 있을 거야/ 차갑게 맞아줘도 돼 결국엔 뜨거울 걸…’ 와인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편하고 자유롭게 대해야 한다.

와인에 대한 나의 유일한 버킷리스트는 앞선 소박한 글과는 달리 의외로 뻔뻔하다. 화창한 오월에 프랑스로 와인 투어를 가는 거다. 루아르 강변의 고성(古城, chateau)에 머물며 여러 샤토의 와인을 음미하며 문학과 예술을 농(弄)하고 싶다. 올해는 글렀으니 내년이나 후년의 오월을 기약해야겠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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