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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3월을 보내며 ‘윤덕영’을 떠올리다
2023. 03. 29 by 울산제일일보

서울 종로구의 서쪽은 인왕산과 맞닿아 있다. 인왕산은 높지는 않으나 한양도성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명산이다. 겸재의 ‘인왕제색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의 규모에 비해 산세가 웅장한 산이다. 옥인동 쪽으로는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려 이 계곡을 ‘옥류동 계곡’이라 불렀으며, 경치가 빼어나 많은 문인과 화공이 찾아와 시(詩)와 그림(?)을 남기곤 했다.

사대부들이 모여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던 시사(詩社)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영·정조에 이르러 큰 변화가 생겼다. 중인들도 이런 시사를 결성하여 풍류를 즐기게 된 것이다. 이들은 주로 통역, 세관, 서리 등에 종사하던 전문직들로 일찍이 외국을 오가며 청(靑)과 서구의 신문물을 체득한 신지식인 계층이었다. 정조 때 천수경이란 중인이 이 계곡에 ‘송석원’이라는 집을 짓고 중인들만으로 ‘송석원시사’를 결성하여 매일같이 모여 시문을 논하고 월하음주(月下飮酒)를 즐겼다고 한다. 이 모임은 김홍도가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를 남길 정도로 유명하였다.

이런 조선 후기의 중흥 기운은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힘을 잃었고, 다시금 시작된 권문세가에 의한 세도정치로 조선은 급격히 쇠락하게 된다. 아름답고 청정했던 송석원 일대도 순조 때는 당시 세도가였던 신안동 김씨 일가의 소유로 바뀌었고, 고종 때는 명성황후를 등에 업은 여흥 민씨의 소유로 바뀌는 등, 이곳은 탐욕과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친일매국노라고 하면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떠올리는데, 이들보다 열 배 이상 친일매국을 한 자가 윤덕영이다. 윤덕영은 1873년생으로, 의정대신을 역임한 조부 윤용선의 후광을 업고 젊은 나이에 여러 요직에 중용되었다. 총리대신 비서관, 법무국장, 경기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철도원부총재 등을 거쳐 동생 윤택영의 딸이 순종효황후에 책봉되자 1908년 시종원경에 임명되면서 왕실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일주일 전에 창덕궁에서 열린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순종이 한일합방문서에 옥새를 날인해야 하는 순간 옥새가 없어진 일이 있었다. 조카딸인 효황후가 빼돌린 것인데, 황후의 치마폭을 들추는 패악질을 하며 옥새를 찾아내서 합방문서에 날인을 하게 한 일등공신이 윤덕영이다.

이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子爵) 하사와 더불어 은사금 46만원을 받았다. 이완용이 3만원을 받았으니 일제가 그의 공을 얼마나 높이 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돈으로 옥인동 일대의 땅을 절반 넘게 사들였는데, 이때 송석원도 윤덕영의 소유로 넘어갔다. 윤덕영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송석원 부지에 유럽식 대저택을 건축했다. 규모가 웬만한 유럽 궁전을 뺨칠 정도였는데, 건축자재 일체를 일본과 유럽에서 수입해서 지었다고 한다. 1913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1935년에야 최종완공이 될 정도로 대공사였고, 이 아방궁 건물을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명명하였다.

하지만 본인은 정작 들어가 살지 못했는데, 백성들로부터 ‘매국노’, 혹은 큰 머리통 때문에 ‘대갈대감’ 등으로 불리며 늘 지탄과 놀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수산장은 ‘세계홍만자회’란 희한한 단체의 조선지부에 임대하고, 본인은 벽수산장 뒤에 지은 3층짜리 양옥집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대해준 단체의 조선지부장이 본인이었으니 ‘눈 가리고 아웅’한 셈이다.

윤덕영은 친일 인사가 되기 전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전력도 있는 것으로 보아 시류를 매우 잘 탔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식산은행, 해동은행 등 이권이 걸려 있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사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엄청난 치부를 하였다. 이완용은 애국지사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도 했으나, 윤덕영은 아쉽게도 이런 위해(危害) 한번 안 겪고 평생을 호의호식하다 해방 전인 1940년에 죽었다.

벽수산장은 해방 후 병원, 미군 숙소, UN기관 등으로 사용되다 1966년 화재로 전소되면서 철거되었다. 그러면서 벽수산장은 물론 윤덕영도 세월 속에 잊혔다. 3월은 항일열사를 기리고 친일매국노를 단죄해야 하는 달이다. 2023년 3월은 유난했던 3월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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