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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이상한파 속의 LA 가족여행
2023. 03. 05 by 울산제일일보

“일 년 내내 온화한 날씨를 보이던 로스앤젤레스에도 폭설이 쏟아지면서 처음으로 눈 폭풍 경보가 발령됐습니다. 주택과 도로가 하얀 눈에 파묻혔습니다. 열대 지방의 상징인 야자수에도 눈이 쌓였고, 로스앤젤레스의 명물 할리우드 간판은 눈보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도된 내용이다. 이런 기록적인 기상이변을 지난달 하순에 현지에서 몸소 겪었다. 엘에이 카운티 패서디나에 있는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딸아이를 만나러 가족여행을 간 것이다.

첫날과 둘째 날은 전형적인 엘에이 날씨였다. 낮에는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반팔로 다녔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포치에서 멕시코 요리에 맥주와 위스키를 곁들이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기도 했고, 정원에 활짝 핀 목련꽃 그늘 아래에서 햄버거와 캘리포니아롤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셋째 날부터는 비가 내리며 기온이 크게 떨어져 야외 행사는 실내 행사로 바뀌었다. 대화는 주로 아내와 딸아이가 이끌고 아들 녀석이 가끔씩 끼어든다. 나는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버번위스키를 음미한다. 밤이 깊어지자 아내는 딸아이 집에서 자고, 나와 아들은 우버택시를 타고 호텔로 간다. 호텔 거실에서 조금 부족한 알코올을 채우려 홀짝대고 있으면 어느샌가 아들 녀석이 잔을 들고 나타나 같이 대작한다. 먼 이국에서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인가, 평소 나누기 힘든 여러 이야기가 오간다. 어느 날은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꺼낸다. “아빠, 내일까지 등록금 내야 해요!” 하면서 자연스럽게 등록금을 갈취해 가기도 한다.

아내는 딸아이의 집을 정리하고 필요한 물품을 사 나르느라 여념이 없다. 운전은 딸아이가, 물건을 고르는 건 아내가, 카트를 몰며 짐을 나르는 건 아들이, 계산은 내가, 이런 식으로 분업화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장을 보러 다녔다. 그 와중에 아들과 내가 좀 안 되어 보였는지 놀다 오란다. 잽싸게 근처의 렌터카 회사에서 밴을 빌려 엘에이 근교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운전은 자동차에 진심인 아들 녀석이 했고 나는 렌터비랑 기름값을 냈다.

첫 번째 행선지는 그리피스 천문대였다. 엘에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핫플레이스란다. 늘 느끼지만 노는 운(運)은 타고난 것 같다. 패서디나를 벗어나니 비는커녕 햇살이 우리를 반긴다. 그리피스 천문대에 주차공간이 없어 중간에 잠깐 차를 세우고 인증샷만 몇 장 찍었다.

“다음 행선지는?” 바로 답이 나온다. “산타모니카 비치!” 시내를 가로질러 산타모니카로 향했다. 쨍한 햇살과 강렬한 바람이 우리를 맞는다. 비치의 양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장대하다. ‘여기가 이 정도면 롱비치는 얼마나 길까?’라는 나의 감상과는 달리 아들 녀석은 ‘방금 지나왔던 길이 자동차 게임에서 보던 길과 너무 똑같다’며 흥분한다.

다음날 코스는 내가 잡았다. 삼십 년 전에 출장으로 갔던 산타바바라로 향했다. 패서디나는 계속 비가 제법 내렸다. 이날도 30분쯤 달리니 빗줄기가 가늘어지다 마침내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 같은 해안도로를 따라 추억의 산타바바라에 도착했다. 해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삼십 년이면 강산이 세 번 변했을 시간인데 이곳은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그동안 나만 시간을 먹었다.

그리고 이삼일 비가 더 많이 왔고 기온은 더 내려갔다. 가끔씩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는데 그 순간 그리 멀지 않은 산에 하얀 눈이 쌓인 게 야자수 사이로 보였다. 우리가 돌아온 다음 날 눈폭풍이 엘에이 시내에 몰아쳤다.

딸아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5년을 객지에서 살면서 부모 도움 없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왔다. 일부 지도층 인사 자녀들이 ‘아빠 찬스’로 진학도 하고 취업을 하는 걸 보면, 딸아이가 퍽 대견하다. 게다가 혼자 집도 구하고 차도 사고 가구들도 혼자 사다 날랐단다. 이번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가족들을 패서디나 인근의 맛집과 명소엘 데리고 다녔다. 이렇듯 의젓하고 선한 인재로 자라준 딸아이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간밤에 딸아이에게 문자를 남겼다. “난방비 아끼지 말고 틀으렴. 아빠가 지원해줄게 ~^^”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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