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울산제일일보
뒤로가기
전재영 칼럼
공평한 봄을 기다리며
2023. 02. 05 by 울산제일일보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며, 좋은 날과 경사로운 일이 많아지라)’, ‘국태민안 가급인족 (國泰民安 家給人足=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충족하라)’,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부모님은 천년토록 장수하시고, 자손들은 만대토록 영화로우라)’,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 (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부지런히 일하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어 손님을 잘 대접하면 온갖 복이 찾아온다)’

위의 글들은 입춘방(立春榜) 혹은 입춘첩(立春帖)의 대표적인 글들이다. 현재까지도 화석처럼 풍습이 남아 있는 입춘방은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봄기운이 막 돋아날 무렵인 입춘을 실질적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고 새해의 안녕, 대길, 장수, 풍년, 무병무탈 등을 기원하는 풍속의 일환이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설날에 문신들이 임금께 올린 연상시(延祥詩=신년축하 글) 중에서 잘된 것을 골라 대궐의 기둥에 입춘방으로 붙여 춥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됐음을 자축하였다고 한다. 이 풍습은 이후 민가에까지 전파되었고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겨울철이면 봄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신선한 봄나물을 먹고자 한다. 요즘이야 마트에 가면 한겨울에도 봄나물이 넘쳐 나지만 예전의 조선시대 때는 어땠을까.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입춘절에는 절식(節食)으로 ‘오신반(五辛飯)’ 혹은 ‘오신채’라 하여 맵거나 신 맛의 채소를 먹었다고 한다. 경기도 산골지방에서 움파, 산갓, 당귀싹 등을 진상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움에서 당귀, 산갓, 파 등을 길러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른 기록에는 계곡이나 산야의 눈 속에서 자란 새싹을 채취하였다 하는데, 겨울을 지내는 동안 신선한 채소가 귀하였던 예전의 실정을 생각할 때 매우 귀한 절식인 셈이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오신반은 궁궐이나 일부 상류층에서나 먹었을 것으로 보이고 일반 가정에서는 쌉쌀하거나 신맛이 나는 산나물을 먹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겨울을 보내며 봄을 기다리는 풍습 중에는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것이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 간에 크게 유행했었고, 현재도 풍류를 아는 일부 층들이 즐기고 있다. 겨울이 가장 깊다는 동짓날, 백지에 아홉 개의 꽃잎을 가진 매화를 아홉 송이 그려 놓고 그날부터 하루에 꽃잎 하나씩을 채색해 나가는 풍습이다. 이렇게 여든한 개의 꽃잎을 모두 채색하면 양력 삼월 중순이 되는데 이때는 온천지에 봄꽃이 피기 시작한다. 완연한 봄인 것이다. 추운 겨울날 꽃잎 하나씩 채색하며 봄을 기다리는 여유와 낭만이 느껴지는 풍습이 아닐 수 없다.

입춘절이 되니 햇볕의 온도가 벌써 다르다. 그리고 온 대지에 생명력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원래는 봄을 기다리는 한시(漢詩)나 시조(時調) 따위를 읊조리며 선비 흉내를 내려 했었다. 그런데 문득 신문을 읽다가 필자를 대오각성(大悟覺醒)하게 하는 기사를 접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도 키이우에 사는 10~20대 젊은이들이 쓴 한글 일기에 관한 기사였다. 한국문화가 좋아서, 혹은 한국기업에 취직하려고 배운 한글로 삐뚤빼뚤 써내려간 일기들이 모아져서 ‘2022년 봄 나의 일기’란 책으로 나왔다고 한다. 잠깐 내용을 더듬어 보자.

“2022년 3월 1일. 저는 지하실에서 보냈어요. 겨울이 끝났지만 알지 못했어요.” “저의 봄이 짧았지만 어려웠어요. 많이 울고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나의 봄은 사라졌다. 정신을 잃지 않게 노력하지만, 긴장을 견딜 수 없다.”

한쪽에서는 봄을 기다리며 옛 풍속이 어쩌고저쩌고 선비놀음을 하는데,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는 계절 변화를 느끼기는커녕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어린 세대들이 있다는 현실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구구소한도의 마지막 꽃잎이 채색되기 전에 우크라이나에도 진정한 봄이 찾아올 수는 없을까.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