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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봄은 왔건만
2020. 03. 16 by 울산제일일보

기원전 30여년 전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의 일이다. 당시 한나라는 소위 ‘북방 오랑캐’라고 일컫는 흉노족의 외침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기원전 33년 흉노족 내부에 분란이 발생했는데, 이때 패배한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로 도망을 왔고, 원제는 직접 교외까지 나아가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이에 감동한 호한야는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자청했고,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자기에게 간택되지 않은 궁녀들에게 연회의 참석을 명하고, 호한야는 이중에서 배필을 정하게 되었다.

이때 호한야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고 간택된 궁녀가 왕소군(王昭君)이다. 왕소군은 후베이(湖北)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적부터 가무·비파 연주 솜씨와 자색이 뛰어나 18세에 궁녀로 뽑혔다. 그런데 이렇게 선발된 궁녀가 수천 명이나 되다 보니, 왕소군은 5년 동안 원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궁녀 신분으로 외롭고 쓸쓸하게 궁중생활을 보내다 느닷없이 흉노의 땅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왕소군은 눈물을 뿌리며 고향 땅을 떠나 수만 리 머나먼 흉노의 땅으로 시집을 갔다. 대단한 미인을 맞이하게 된 호한야 선우는 그녀를 극진히 대우했고, 왕소군 역시 품성이 어질고 영민하여 흉노족에게 길쌈을 가르치고 흉노와 한나라와의 우호를 유지하는 데 힘써, 60년 동안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흉노족은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고, 호한야는 그녀를 ‘녕호알지寧胡閼氏’에 봉했는데, 이는 흉노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준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상이 유명한 왕소군에 얽힌 정사적(正史的) 일화다. 모든 스토리는 야사(野史)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왕소군에 얽힌 야사는 이천년이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이것저것 많이 전해온다. 그 중의 하나가 한참 후대인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東方?)가 왕소군의 호지(胡地)에서의 삶을 매우 춥고 삭막하고 외로웠을 것으로 다소 과장되게 포장하여 남긴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다. 그 시의 제5 수에 다음과 같은 시구(詩句)가 나온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즉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이는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쯤의 시다. 이 중에서도 두 번째 구절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1980년 봄, 모 정치인이 인용하면서 너무나 유명한 문구가 되었다. 그때는 군사독재 시대로 회귀하는 것을 통탄하며 뱉은 말이었는데, 정확히 40년이 지난 요즘도 그때만큼이나 어울리는 시구가 아닌가 싶다.

코로나19 사태는 중국을 넘어 국내로, 전 세계로 들불같이 번지고 있다. 그야말로 판데믹(Pandemic)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 특성상 거의 모든 여행과 외출이 자제되고, 경제 활동도 거의 정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쇼핑도 TV나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쇼핑으로 바뀌어 대형 쇼핑몰을 가도 예전처럼 복작거리지 않고, 고속도로에도 눈에 띌 만큼 차량이 줄어 한산할 정도다. 각종 모임도 취소되어 휴업하는 음식점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회사 안에서도 항상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개인 간에도 ‘사회적 거리 두기’니 하면서 일체의 대면(對面)활동을 제한해 달라는 권고를 받는다.

매주 이용하던 KTX 등 대중교통을 이용한 지도 달포가 넘었고, 각종 회식이나 모임을 가진 지도 근 한 달은 된 것 같다. 또한 벚꽃축제와 같은 각종 봄철 행사도 취소되고,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연기되거나 축소되는 등 파행이 잇따른다. 이렇듯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다 보니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심리적 위축이 더 큰 문제다. 불안감 혹은 우울증을 하소연하는 글이 SNS에 점점 늘고 있다.

이렇게 심리적 고통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상하게 뭘 하고 싶은 욕구도 더 커진다. 마치 학창시절 시험공부 할 때, 이 시험 끝나면 뭘 해야지 할 때처럼.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하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 우선은 이 봄이 가기 전에 수양버들이 늘어진 천변 길을 마스크 없이 거닐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싶다. 봄비가 오시는 날엔 봄꽃이 아름답게 핀 카페에서 모카향 그윽한 커피를 지인들과 음미하며 얼굴을 맞대고 담소하고 싶다. 벚꽃 잎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날엔 우인들과 어울려 벚나무 꽃그늘 아래서 막걸리 잔 돌리며 취중진담을 나누고 싶다. 하늘이 푸르고 파도가 높은 날엔 바닷가 선술집에서 고소한 봄도다리에 쇠주 한잔 하며 봄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다.

오랜만에 답답한 마음도 풀 겸 숙소 주변 야산엘 올라가 봤다. 이미 산에는 진달래꽃이 한창이고 벚꽃도 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정신과 마음은 아직도 1월에 머물러 있다. 봄은 왔건만, 아직 봄은 멀었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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