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울산제일일보
뒤로가기
박정학의 역사산책
세종실록이 식민사학의 원조?
2020. 03. 15 by 울산제일일보

식민사학 중에는 고조선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진다는 삼조선(三朝鮮) 설이 있다. 교원대학 교수 송호정이 2018년 10월 초 EBS 방송에서 그 내용이 『삼국유사』,『제왕운기』 기록에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를 합리화시켜 주려고 한 데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것이 조선조의 사대사관이다. 일제가 바로 이 사대사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식민사학을 만들었으므로 함께 극복해야 할 대표적 사례이기에 삼조선 설을 다시 산책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에는 다음과 같은 삼조선 기록이 적혀 있다. “(평양부는)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 곧 평양부·平壤府)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 이를 쳐서,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바로 이 내용이 삼조선 설의 원조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내용을 따오면서 원본과 다르게 고친 것이 문제다. 무진년에 신인(=단군)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다고 했는데, 『제왕운기』에는 본기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환인의 서자 환웅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으며, 그의 손녀와 단수신 사이에 태어난 단군이 무진년에 조선을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제왕운기』에서는 ‘후조선 시조인 기자가 주무왕 즉위 원년 기묘년에 망명하여 이곳에 와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고 했을 뿐, 단군을 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유사』에도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옴에 따라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했지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기자가 단군을 이어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중국 역사책을 봐도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인 《논어》,《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없고, 그 이후에 쓰인 일부 책에만 나오는데, 『한서』에서는 ‘낙랑조선’이라고 했으며,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조선후’라고 했다. 『사기』 조선전에는 주로 위만조선에 관한 내용만 실려 있으며, 위만이 망한 후 중국 사서에서 ‘조선’이라는 용어가 사라지는 점을 감안하면, 기자가 봉해진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주나라 변방의 조선현 또는 위만조선이나 낙랑조선 같은 제후국 조선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고조선’이라고 해석하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이용하여 삼조선 설을 주장하려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이처럼 부실하여 사용할 수 없으니 소위 ‘실증’을 한다면서 허위 유물과 유적을 묻었다가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듯이 꾸며 그 기록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송호정처럼 소위 명문대학을 나온 현재의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간단하게 드러나는 삼조선 설의 허위 기록을 그대로 믿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강의하고, 국사교과서에서는 지금도 준왕과 위만을 고조선의 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2008년부터 외관상 ‘삼조선 설’이라는 말은 없어졌지만, 내용에는 살아있는 것이다. 단순한 학자들의 문제를 넘어 정부 역사인식의 문제다. 정신 차려야 한다.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