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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학의 역사산책
서재필, 과연 기념할 만한 사람인가?
2019. 12. 22 by 울산제일일보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대한 역사교과서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전남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공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과연 그만한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내용을 조금 훑어보았다. 1864년에 태어난 그의 외가인 이곳에는 그의 생가도 복원되고 2008년에는 기념공원도 세워졌다.

공원 설명문은 ‘이곳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성역’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어 ‘미국식 이름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7살 때 상경하여 양외숙인 김성근의 집에서 공부했으며… 1883년 일본 동경의 호산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에 귀국 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갑신개혁을 주도했다. 개혁이 실패하자 본인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을 겪었다’는 기술이 나온다.

아울러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으며,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했다’거나 ‘1898년 수구파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인회를 개최하고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1991년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하여 2003년에 준공한 후 보완 및 보수과정을 거쳐 2008년에 개관했다’는 기술도 나온다.

나는 이 설명문에서 ‘성역(聖域)’이라는 말을 쓸 만큼 훌륭한 일을 한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독립신문 발간일이 ‘신문의 날’이 되고, 정부에서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까지 했으며, 서대문 독립공원 등 여러 곳에 동상이 서 있고, 역사교과서에서도 독립신문과 서재필을 자주독립의 기수였던 것처럼 기술하면서 사진까지 게재하고 있으니, 기념공원을 만들 수는 있겠다. 그러려면 그의 구체적인 공적을 더 찾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죽을 때까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살았다. 국고를 받아 창립한 ‘독립신문사’를 개인 소유로 만들어 다시 나라에 팔아먹고, 근무하지도 않은 7년 10개월의 중추원 고문 월급을 챙겨가는 등의 철면피 행동도 했다. 려증동 교수의 『부왜역적 기관지 독립신문 연구』에 의하면 독립신문은 왜적과 싸운 의병들을 ‘비도(匪徒=나쁜 놈)’라 하고, 청나라로부터 우리나라를 독립시켜준 ‘일본에 감사’해야 하며 ‘일본 돈을 써야 한다’는 등 ‘한국 업신여기기’, ‘청국 배척하기’ , ‘일본 칭찬하기’ 내용을 보도한 ‘왜의 앞잡이 신문’이다. 심지어 1896년 7월 9일 진사 정성우는 “흉칙한 무리 재필이가 만들고 있는 독립신문은 나라가 넘어지도록 도모하는 신문”이라는 요지의 소를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다. ‘일본 간첩’ 평가까지 받는 이유다.

역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가르친다. 따라서 정부든 교과서 집필자든 그를 치켜세우려면 구체적으로 배울 점을 적시해야 한다. 그런데, 서재필, 아니 필립 제이슨은 배울 점보다 비난할 점이 더 많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공식적인 평가와 예우에는 친일파 내지 부왜역적(附倭逆賊)들의 입김이 작용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의 유공자 평가나 교과서의 내용과 함께 보성군의 ‘서재필 기념공원’도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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