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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어떤 창문
2019. 11. 18 by 울산제일일보

한 길고양이가 있었다. 매일 뒷골목을 뒤지고, 새와 쥐를 사냥하며 살아가던 암고양이이다. 무늬는 검은색과 갈색이 뒤엉킨 카오스라는 무늬를 가졌고, 코에는 검은 점이 있으며, 동그랗고 파란 눈을 가진, 그 나름으로 우아한 고양이이다. 우는 소리는 “미오~ 미오~” 하며 어린 아기들의 목소리를 닮았으며,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꼬리를 가진, 그런 길고양이이다.

이 길고양이는 거칠고 드센 다른 길고양이들을 피해 조용하고 외진데서 홀로 먹잇감을 사냥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다니는 경로 중에는 모 대학교 기숙사 지붕도 있었는데, 그 지붕과 맞닿은 옆 동 기숙사는 층고가 높아 창문이 지붕에 면해 있었다. 그 창문 중에는 자주 열리는 ‘어떤 창문’이 있었고, 그 길고양이는 그 창문이 열려 있으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창문을 주시하곤 했다. 창문 안에는 늘 같은 여학생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고, 가끔씩은 서로 눈이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길고양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러다 한동안은 창문이 닫혀 있었고, 길고양이는 혹시 창문이 열릴까 싶어 창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가곤 했다. 어느 날 다시 창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그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길고양이는 자기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에 훌쩍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여학생도 깜짝 놀라고 길고양이도 놀랐다. 길고양이는 침대 밑의 제일 깊은 곳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여학생은 조용히 앉아 하던 일을 계속했다. 잠시 후 길고양이는 살포시 침대 밑에서 나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이런 일들이 여러 날 계속되었고, 이제는 기숙사 방구석에서 서로 눈을 마주치며 교감하는 관계가 되었다. 마침내 길고양이는 그 여학생의 무릎에 올라가 부드러운 손길을 즐기게 되었다.

길고양이는 여학생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하루는 새를 사냥하여 선물했다. 먹기 좋게 머리와 꼬리를 잘라 창문 앞에 놓았다. 여학생은 질겁하며 창문에서 밀쳐버렸다. 길고양이는 다음에는 더 먹기 좋게 배까지 갈라 창문 앞에 갖다놓았다. 이번에도 여학생은 치워버렸다. 그 다음에는 조그만 뱀을 잡아 기절만 시켜 창가에 갖다놓았다. 여학생은 기절초풍하고는 뱀을 멀리 던져버리고 고양이가 못나가게 창문을 닫아버렸다.

이상은 픽션이 아닌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한 번도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적이 없던 고양이가 어느 날 문득 ‘어떤 창문’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간 것이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 세계로 그 길고양이는 과감히 도전한 것이다. “처음 ‘어떤 창문’을 넘기까지 얼마나 많은 갈등과 두려움이 있었을까?” 필자가 모르는 많은 곡절을 겪으며 그 길고양이는 창문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마치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을 연상케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하략)”

지난주에 대학수능시험이 있었다. 몇몇은 원하는 점수대가 나와 안도의 한숨과 희망에 맘껏 부풀어 있을 것이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좌절의 한숨과 막막함에 고개를 떨구고 있을 것이다.

채 피지도 못한 젊은 친구들이 좌절과 한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나름대로 잘 나가던 친구들도 대학 졸업 후, 취업의 벽에 막혀 ‘헬 조선’을 부르짖고 있다. 필자는 이런 젊은이들을 이끌어야할 기성세대로서 책임이 막중하나 딱히 제시해줄 해결책이 없다.

다만 필자가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 하고 싶은 말은 하나 있다. 제도권에 머무르지 말고 ‘어떤 창문’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란 것이다. 지금까지는 부모님이나 사회적 관습이 정해준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쓸데없이 스펙 쌓기를 통하여 대기업이나 공기업, 혹은 공무원 취직을 준비하느라 아까운 청춘을 허비하지 말고, 다른 이와 서로 협력하는 법도 배우며,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아보라고 강권하고 싶다. 실패할 걸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젊기 때문에 충분히 재기할 수 있고, 이때는 실패한 경험이 성공의 충분한 자양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창문’을 넘은 그 길고양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 고양이는 그 후로도 여러 번 또 다른 창문을 넘어, 지금은 이역만리 독일 뮌헨 근교에서 그 여학생과 함께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마시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야말로 묘생역전(猫生逆轉)이 아닐 수 없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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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입니다 2019-11-22 15:12:28
시적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