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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칼레의 시민’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2019. 10. 22 by 울산제일일보

꽤 오래되어서 정확한 연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십여 년 전쯤인 것 같다. 서울 강남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전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쪽에 문외한인 필자가 왜 갔는지 이 역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관람을 했었고, 꽤나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다.

‘로댕’ 하면 유일하게 아는 작품이 ‘생각하는 사람’뿐이었는데, 이 조각상이 단독상이 아니라 ‘지옥의 문’이란 작품의 한 구성품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크기도 알고 있던 것보다 매우 작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 다름 아닌 ‘칼레의 시민’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던 때라 작품이 그저 사실적으로 잘 만들어졌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제각기 ‘체념’, ‘좌절’, ‘분노’ 등 다른 표정들을 짓는데, 이것들이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켜서 한동안 뇌리에 박혔었다.

얼마 전 유럽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첫 행선지인 영국 런던에서 두 번째 행선지인 벨기에로 가기 위해 ‘유로스타’를 탔다. 열차는 런던을 출발하여 한동안 육상 구간을 지나더니 이윽고 해저 터널을 지나자마자 유럽 대륙의 첫 도착역인 ‘Calais’에 도착했다. 프랑스어를 모르다 보니 이곳이 바로 ‘칼레’라는 것도 객실 방송을 들었을 때 겨우 알았다. 갑자기 십여 년 전의 감흥이 기억의 저편에 숨어 있다가 훅하고 올라왔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계속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 군대에게 포위당한 프랑스의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해 6명의 시민대표가 목숨을 바쳤다는 ‘칼레의 시민’ 일화가 이 작품의 모티브이다. ‘칼레의 시민’일화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지역은 플랑드르(영어로는 플란더스)라고 불리는데, 당시부터 양털로 옷을 만드는 양모산업이 번성했던 곳이고 와인의 주산지이기도 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눈독을 들이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이 양국 간에 백년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도버 해협을 마주하고 있는 북부의 항구도시 칼레는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1347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군대는 칼레 시를 공격했고, 1년여에 걸쳐 잉글랜드 군에 저항했던 칼레의 시민들은 학살당할 위기에 놓였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의 지도자급 인사 6명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나머지 시민들은 살려주겠다고 했고, 이에 시민대표 6명은 다른 시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을 각오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성문의 열쇠를 가지고 에드워드 3세 앞으로 출두해서 칼레 시민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 실화였다는 주장도 있고, 후대에 각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시민의 대표가 처형되었다는 설(說)도 있고,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임신 중이어서 태아에게 해가 될 것을 우려해 처형을 면했다는 설도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중요한 것은 이 일화가 오늘날까지 상류층이 지녀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1884년에 칼레 시에서 로댕에게 이를 기념하는 조각상을 의뢰했고, 5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이 명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유럽에서는 귀족이나 왕족은 물론 지도층 인사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에 지원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싸우는 것은 당연하고, 전사라도 하게 되면 이를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유럽의 상류층이 수백 년간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이에 못지않은 사조(思潮)도 있고 더 숭고한 사례도 많다. 그러나 이런 가문이나 위인의 후손이 후대에도 잘 살고 있고 추앙받고 있다는 미담은 눈을 닦고 찾아봐야 할 정도로 드물다. 이에 비해, 과거에 친일을 했거나, 부정축재를 했거나, 혹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았던 부류들과 그 자손들이 수대에 걸쳐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추담은 넘치고 있고, 그들의 편법(便法)과 사행(邪行)은 현재 진행형이다.

며칠 전에도 공직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 검찰개혁도 완수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지도층 인사가 그를 둘러싼 온갖 편법과 사행이 드러나 중도에 불명예 퇴진하는 일이 있었다. 필자도 예전에 큰 기대를 걸었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흥망을 보며 착잡함을 금치 못했었는데, 공직 사퇴 후 20분 만에 교수직 복직신청서를 냈다는 뉴스를 접하는 순간 일말의 동정도 사라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사하고 시세말로 “이거슨 아니지~” 싶다. 헛헛하고 씁쓸한 가을 저녁이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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