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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학의 역사산책
우리 땅 간도, 왜 포기하나?
2019. 10. 22 by 울산제일일보

얼마 전 인기리에 상영된 영화 ‘봉오동전투’는 두만강 북쪽 40여리에 있는 북간도지역 화룡현 봉오동에서 벌어진 전투다. 1920년 6월 7일, 우리 독립군 700여명의 사령관은 최진동, 전투를 지휘한 연대장은 홍범도였다. 서남산 중턱에 잠복했다가 일본군 주력부대를 유인한 뒤 삼면 협공으로 일본군 157명을 죽이고 200여명을 부상시켰다. 반면 아군은 장교 1명과 병사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다.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커다란 전과였다.

독립군은 그 직전 인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도 매복전술로 일본군 120여명을 죽였고, 그 해 10월에는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 약 일주일간 벌인 청산리전투에서도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오늘 역사산책에서는 그런 전과나 전략의 우수성을 부각시키려는 게 아니다. 그렇게 싸웠던 북간도지역이 어느 나라 영토였는지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모든 역사교과서에는 ‘1909년 간도협약에 따라 일본이 만주철도 부설권과 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줬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간도가 어디이고 누구 땅이기에 일본이 청나라에 넘겨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극히 일부 교과서에만 백두산 너머 만주지역을 ‘간도’라고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교과서를 포함한 모든 교과서에는 고려 이후의 우리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으로만 그려놓고 간도가 우리 땅이 아니었던 것처럼 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이 1903년 간도지역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했고, 그는 1907년을 전후해 지역 자산가인 최재형의 지원 아래 3천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편성,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고 기술한 교과서도 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면 간도는 우리나라 땅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최소한 청나라나 러시아와 국경분쟁을 일으킬 정도로 소유권이 불분명했던 땅이었고, 그랬기에 우리 독립군이 그곳에서 군대를 양성하고 일본군과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곳이 청나라나 러시아 땅이었다면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사전허락이나 협약도 없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내용은 역사교과서에서도 확인된다. 우리가 배워서 알다시피 고조선에서 고구려, 발해 때까지의 영토는 만주지역에 널리 펼쳐져 있었고, 그 지역은 우리 땅이었다. ‘간도학회’와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는 이 만주지역 땅을 ‘간도’라고 부른다. 김종서 박사는 그 지역에서 발굴된 흑룡강·요하문명의 유적과 유물이 우리 신시 시대와 고조선 시대의 것이고 우리 겨레의 문화라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우리 광복투사들이 독립군을 양성하고, 전투를 벌인 간도지역이 역사적으로 우리 땅이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1909년에 ‘간도협약’을 통해 청나라에 넘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항복문서인 1948년의 ‘샌프란시스코조약’이나 1965년의 ‘한일협약’에는 1909년에 일본이 청나라와 맺은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선언이 들어있다. 이 같은 사실에서 간도가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우리 땅이라는 것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교과서에서는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또 국회는 헌법에서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제한함으로써 간도를 버리고 있으며, 정부는 간도협약 무효에 따른 영토 반환을 중국에 요구하지 않고 있다. 복잡하지도 않고 명확한 우리 땅을 왜 이렇게 하나같이 포기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국민들이 나서서 그들을 쫓아내든지 그렇게 하도록 만들든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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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규 2019-11-24 15:05:32
간도에 대해 관심을 더 가지고 우리땅이란것을 확실히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