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울산제일일보
뒤로가기
박정학의 역사산책
‘고릿적’은 ‘高麗 때’라는 의미
2019. 04. 29 by 울산제일일보

나는 어릴 적 삼동면에서 자라면서 ‘옛날 옛날 고릿적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했다. 더구나 이 말이 초등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던 ‘고구려’ ‘고려’라는 나라와 연결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교과서에서는 ‘고구려’ ‘고려’라는 나라가 있었고, 특히 고려 때는 대외교류가 활발하여 “벽란도를 다녀간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코리아’ 또는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서방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 공부를 하다 보니 ‘고구려’ ‘고려’가 아니라 ‘고구리’ ‘고리’라고 해야 옳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고릿적’이라는 말이 ‘高麗 때’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우리는 ‘고구려’ ‘고려’라 하지 않고 ‘고구리’ ‘고리’라고 했다는 한자 발음의 근거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왜 ‘고구려’ ‘고려’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볍게 산책해본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자전에서 ‘麗’자의 발음부터 찾아보자.

1883년 판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 ‘麗’자는 ‘고울 려’와 함께 ‘부딪칠 리’ ‘나라이름 리(‘高-, 東國名)’라 했다. 이때 중국식 발음을 반절음으로 ‘?知切(=리)’라면서 그 예로 ‘[魏志]高句- 在遼東之東’이라 표기했다. 이처럼 1990년 이전에 나온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자전에서 ‘麗’는 ‘고울 려’, ‘나라이름 리’라 했고, 나라 이름 리 앞에 ‘高句-’, ‘高-’라는 사례까지 붙여놓았다. ‘고구리’ ‘고리’라고 읽으라는 말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나온 책과 인터넷에는 나라이름 ‘려’라고도 하지만, 근래에 발행된 『조선어정음훈석』(제환명, 2014)에 의하면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직후에 나온 『월일석보』에는 ‘高麗’의 발음을 요즘 한글로 ‘고리’라고 읽었다.

중국의 『강희옥편』도 ‘고울 려(美)’, ‘빛날 여(華)’와 함께 ‘부딪칠 리’ ‘나라이름 리(國名)’라 하고 그 예로 ‘고구-’ ‘고-’를 들었고, 현재 중국 사람들도 ‘高句麗’ ‘高麗’를 읽을 때는 ‘리’로 발음한다. 특히, 한자의 시대별 중국발음을 볼 수 있는 중국책 『한자고금음표』에는 ‘麗’의 상고음은 ‘lie’, 근·현대음은 ‘li’ ‘le’라 표기하여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고려 때 우리나라가 코리아란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코리아’가 아닐 수도 있다. 영어권에서는 ‘Korea’라 하여 코리아로 읽을 수 있으나 스페인어권이나 동남아에서는 ‘Choree’ 또는 ‘꼬리’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고려’가 아니라 ‘고리’라고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우리 겨레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 바이칼호수 지역에는 지금도 ‘Khori’족이 살고 있고, 중국사서의 상고시대에 우리와 연관되는 ‘고리(槁離)’라는 나라이름이 나오는 데서도 고대 우리나라가 ‘고려’가 아니라 ‘고리’였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내가 어릴 적 울산에서 자랄 때 ‘옛날 옛적’이라는 의미의 ‘고릿적’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고, 그것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옛날의 때’라 설명한다. 이를 ‘古來’라는 한자어와 연결 짓는 사람도 있으나 ‘적’이 때를 가리키는 말이니 ‘고릿적’은 ‘고리라는 나라의 때’로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일반적으로 ‘高麗’를 ‘고려’가 아니라 ‘고리’라고 불렀을 개연성이 높다.

이상의 자료로 미루어 高句麗, 高麗의 음은 적어도 조선 초기까지는 분명히 ‘고구리’ ‘고리’였고 그 이전에 ‘고구려’ ‘고려’라는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음이 변한 과정과 이유를 추적하여 나라 이름을 바로잡아야 역사도 바로 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