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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학의 역사산책
박상진 총사령, 이젠 재평가되어야
2019. 03. 06 by 울산제일일보
대한제국 말 의병정신을 이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그는 역사적으로 의병들이 나라를 지켜온 우리 역사에서도 빛나는 인물이다. 최근에 그분의 활동을 접하면서 무단히 내 자신이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 고향이 울산이고, 같은 박가이며, 나도 ‘역사의병대 총사령’을 하고 있음에서다.

『부산지방법원 100년사』에 ‘대한민국 법조인’으로 소개된 울산 출신 고헌(固軒) 박상진(1884~1921) 의사는 1910년 봄에 실시한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재판소 판사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당시의 재판이 일본인에 의해 독단적으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를 내 손으로 단죄할 수 없다. 판사라는 직무로서보다 무장광복투쟁을 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득이 될 것’이라며 판사 취임을 거부하고 광복투쟁에 헌신하신 분이다.

대한제국기에 의병장 신돌석, 김좌진 장군과 의형제를 맺고, 훗날 김좌진 장군을 자신이 창설한 광복회 만주 부사령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11년에는 만주로 건너가서 이상용, 김동삼 등을 만나고 돌아와 국내지원을 담당했다.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런데도 1963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3등급 건국훈장인 ‘독립장’을 수여했다. 1등급인 김좌진 장군보다 낮은 훈장을 받은 것은 광복투쟁 기간이 7년 이하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당시 정부 요직에 있었던 친일행위자 후손의 방해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누구나 선호할 판사직을 박차고 광복투쟁에 헌신한 박상진 의사의 행적을 볼 때,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1913년에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중앙본부’에 참여했고, 1915년 7월 15일에는 광복회(‘광복단’으로도 알려졌고, 해방 후에는 ‘대한광복회’라고도 함)를 결성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했다. ‘독립’이 아니라 ‘국권회복’ 즉 ‘광복’이 목표였다. 1910년에 일본에게 강탈당한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 광무 황제의 장례를 치른 1919년 3월 1일에 ‘독립선언’이 나왔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독립이 된 이후에는 대한민국 국권 회복 차원의 ‘광복투쟁’으로 이어져 1945년에 광복을 했다. 그러니 1910년대에 ‘광복’을 생각한 것은 매우 앞선 의식이었다.

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이라는 4대 강령을 내걸고 일제의 세금 운반 차량을 탈취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으며, 친일분자의 색출과 암살 등 ‘힘을 바탕으로 한 광복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광복투쟁 자금 모집에 불응하는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그의 외가, 처가 쪽으로 인척 관계였던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택상의 아버지)을 처단한 데서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박 의사는 1917년 12월 20일(음력) 광복회 조직의 발각으로 체포돼 1919년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변호사 선임 등을 거부하고 1921년 8월 11일에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이런 그의 활동을 감안할 때, 1996년 8월 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1825년에 지어진 울산시 북구 송정동의 박 의사 생가가 2007년에 복원돼 시 지정문화재로서 보존되고, 1978년 ‘(사)고헌 박상진 의사 추모사업회’(회장 박대동)가 결성돼 박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국민들이 자기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할 때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보훈등급을 상향조정하고, 그 후손들에 대한 배려 등을 통해 목숨 바쳐 광복투쟁에 나선 위국수명(危國授命) 정신을 이 시대에 되살려내기 위한 모범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도 나라가 위험해질 때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자발적 민병인 ‘의병’들이 더 나와 나라를 살릴 것이다.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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