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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산책
김장배추를 심으며
2018. 08. 29 by 울산제일일보

김장배추를 심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육종연구의 세계적 대가 우장춘 박사(1898∼1959)다.

태풍 솔릭과 처서도 지나가고 맞이한 첫 주말, 농업기술센터에서는 무와 배추에 대한 맞춤형 텃밭농장 교육이 한창이었다. 농업기술센터 주말농장은 어르신인 실버, 그리고 다둥이·다문화 가족을 중심으로 교육과 현장실습을 통하여 우리 사회와 좀 더 소통하는 장을 만들고자 추진하는 것으로, 올해는 108 가족이 참가하고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농사에는 ‘최적의 시기’라는 것이 있고 이만큼 중요한 것도 별로 없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농사의 대부분을 하늘과 땅, 기후라는 자연에 의존하거나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세계사를 들추어 보면 ‘7년 대한(大旱)’ ‘9년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나라가 통째 흔들린 경우도 있었다. 올여름의 폭염과 가뭄은 우리가 최근에 체험했기에 더 크게 다가올 뿐이다.

적기에 무·배추를 심어야하는 텃밭농장 교육생을 대상으로 태풍과 같이 큰물 덩어리의 대이동과 태양빛과 같은 큰불의 일상적이고 끊임없는 공급이 농사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와 같이 자연의 이치를 알고 농사에서 적기와 적지를 알면 품질과 수량을 높이는 것은 물론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도 적잖은 도움이 된다. 막연히 안전하고 품질이 좋은 농산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과 농사기술을 활용하여 실천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텃밭농장에서 얻을 수 있는 배추 한 포기도 어디서부터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면 더 흥미로워지고 새롭게 보게 된다. 필자가 텃밭농장 교육을 시작할 때마다 꺼내는 인사말 속에 꼭 등장하는 분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속이 꽉 찬 배추를 가지고 마음껏 김치를 담글 수 있게 해준 위대한 분, 바로 우장춘 박사다.

이야기는 1936년 우장춘의 박사학위 논문 <종(種)의 합성> 발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세계 육종학계 최대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배춧속(屬)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란 논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교배는 같은 종(種)끼리만 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우장춘 박사는 종은 달라도 같은 속(屬)의 식물을 교배하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 논문 발표로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라는 가설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여기에 더해 종은 기존의 종간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의 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우장춘 박사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여생을 흔쾌히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일본에서 귀국했다. 1951년부터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 우 박사는 채소 종자를 생산하기에 알맞은 땅을 찾으러 제주도를 방문했다. 제주도는 장마가 빨라 꽃과 열매 맺는 시기가 겹쳐 좋은 종자 생산이 어려웠다. 그 대신 모든 여건이 감귤 재배에는 알맞다고 판단했다. 우 박사는 제주도 농민들에게 감귤 재배를 적극 권장했고, 그 덕분에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감귤 생산지가 됐다.

우 박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던 강원도 감자의 품종 개량에도 뛰어들어 맛 좋고 병충해에 강한 강원도 감자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또 맛 좋고 병에 강하며 속이 꽉 찬 ‘청방’ 배추와 무 품종을 만드는 데도 성공해 김치 종주국으로서 일대 혁신을 이루는 데도 기여했다. 제주 감귤과 강원도 감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유명해졌다. ‘결구배추’ 하면 ‘청방’이라는 품종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우리네 할머니들이 아직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계절의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돌고 돌아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기 직전이다. 추석은 다가오는데 폭염과 태풍으로 과일의 수확량과 품질이 걱정된다. 이러한 위기일수록 농업기술센터가 앞장서서 선진 기술을 최대한 실천하도록 도와 풍성한 가을과 추석을 맞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오늘도 우리는 배추를 심으며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 한 숟갈 위에 쭉 찢어 올린 배추김치를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가을을 한 가슴 안아보자.

윤주용 울산시농업기술센터 소장,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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