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어른이 되었다(2)
2011-02-01 울산제일일보
드디어 한 이틀이 지난 뒤 헌병대라고 하면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었다. 나도 도봉산 밑에서 헌병들로부터 봉변을 당하면서도 헌병 하나의 이름을 외워두었던 참이라 그 이름을 확인시켜주면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마음을 놓게 하고 헌병대 소속을 물어보았다. 순수하게 소속을 밝히며 사과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는 다짐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옛날 병무청 자리, 동화 백화점(지금은 신세계 백화점)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당시로서는 유명했던 헌병부대를 찾아갔다. 어느 군의 헌병 부대인지 차마 밝히지 못한다. 마침 그 부대에는 친지가 법무장교(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선 이 장교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한마디로 ‘헌병이 장교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군대 기강의 근본 문제를 제기하며 좀 더 철저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결론짓고 돌아왔다. 그 친지로부터 통보된 바로는 나에게 행패부린 헌병들 모두를 찾아 강한 기압을 주었노라고 하였다. 아마 다음 날 모두가 공군사관학교로 가서 용서를 빌 터이니 적당히 해주라고 타협을 해왔다.
여기 이런 회고록에서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은 다른 장교들의 교육(?)을 끝으로 나에게 행패부린 헌병들에게 용서가 내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정도 했으면 되었지 않은가라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으나 철저한 집념의 결과는 달랐다. 행패부린 헌병들 중의 한 사람은 친형이 공군 파일럿으로 현역 장교였다. 이 장교 외에도 다른 고위층을 통해 여기저기서 압력과 타협이 들어왔다. 이때는 이미 공군사관학교 법무장교가 군법회의를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압력은 더 다양하고 거세었다. 적당히 용서하고 더 크게 확대 시키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나의 생각은 달랐다. 집념이 더 굳어지고 있었다. / 정리=박해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