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철학
2010-04-08 박문태 논설실장
양반들은 고급스럽고 진귀한 음식들은 따로 따로 만들어 즐겼다. 서민들은 대충대충 섞어먹었다. 전주비빔밥에는 장조림 쇠고기가 들어간다. 물론 청포묵이 들어가야 전주비빔밥이라고 한다. 장조림과 청포묵은 서로가 독특한 맛이 있는데 이 두 가지만을 섞어먹으면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엉뚱한 맛이 느껴진다. 즉 이것저것 섞어서 혼합 시켜 놓으면 개개의 독특한 맛은 잃어버리게 된다.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억지에 가깝다.
어쩌다보니 현재의 전주비빔밥이 유명해졌지만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지방마다 다르다. 또한 옛날의 비비는 방식은 없어지고 음식점에서 내놓는 방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만을 비교한다. 뜨거운 밥을 먼저 놓고 그 위에 재료를 올려놓는 방식이 있고, 반대로 재료를 먼저 깔아놓고 그 위에 뜨거운 밥을 나중에 놓는 방식이 있다. 이때 고추장과 참기름을 섞는 순서가 약간 씩 다를 수가 있다. 전자의 방식에서는 먹으려는 사람이 재료를 선택하여 비빌 수 있다. 쇤 고사리를 골라내어 먹지 않는다든지 들깻잎을 더 넣는다든지, 아니면 묵은 김치조각을 넣는다든지 하는 것이다. 후자의 방식에는 골라내기 어렵다. 이미 고추장과 참기름이 섞여있어서 맛을 내기가 어렵다.
이렇게 비벼놓은 밥에서 실제 입안에서 각 재료의 맛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우리 혀의 맛보는 부위가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비빔밥의 맛을 재료별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씹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맛이 달라지지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도 신경 쓰며 찾아보면 느낄 수 있는 재료들이 있다. 특히 참기름이 그렇고 육회가 그렇다. 고추장이 입안에 가득 차 버리니까 식사를 마칠 때쯤에는 무감각해지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작 맛을 느껴야 할 ‘쌀밥’의 맛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다.
비빔밥 철학의 본론은 선거로 뽑는 여러 수준의 의원들에 있다. 국회의원부터 구의원까지 그 조직 속에서 한 데 모아놓으면 비빔밥이 되고 만다. 우선 어떤 재료를 넣어 비빌 것이냐가 유권자들의 선택이다. 4.19 직후에 뽑은 국회들은 노무현 탄핵 정국 뒤에 뽑은 국회의원들처럼 제대로 선택되지 않고 한 가지 재료에 편중되었다. 다른 재료(자유당)가 상했다고 외면해버린 것이다. 가끔 간장 역할을 하는 각 단위수준의 의원들이 있어도 처음 맛을 낼 때 그 존재 이유가 있지 조금만 지나면 간장의 맛이 사라지고 말듯이 그의 존재가 없어진다. 물론 이런 맛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성질은 재료 자체에 있지만 그 맛을 확인해주는 기능은 언론의 역할에 있다. ‘이런 맛도 있으니 이 맛을 느껴보시오. 이 재료는 맛이 갔으니 아예 비빌 때 빼는 것이 좋겠소. 프로파일링을 해보니 이 재료의 성격은 시간이 지나야 나타나게 되었소.’ 이런 일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으면 최적의 민주주의 국가이다. 아울러 최적의 언론 수준을 전제로 한 것이다. 선거법이 있고, 그 전에 명예훼손죄가 언제나 있어서 비빔밥 재료의 프로파일링을 할 수 없으니 유권자가 제대로 비벼서 식사를 해야 한다. 재료를 잘 못 섞어도 유권자의 책임이고, 잘 비비는 것도 유권자의 책임이고, 맛을 안 보는 것도 유권자의 책임이다. 잘 뽑아서 잘 비비고 잘 부려먹어야 한다. 쌀밥 맛을 살리며.
/ 박문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