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색 짙은 응원구호 ‘화이팅’
2019-10-13 울산제일일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일본말 찌꺼기가 수북이 쌓여 있다. 어떤 분야는 일본식 용어를 안 쓰면 일이 안 될 만큼 많아서 골치다.
몰라서, 바꿔 쓸 말이 없어서 그런다면 이해라도 가겠다. 연세 지긋한 한글단체 어른들의 무책임이나 학자 또는 공무원들의 무관심, 무능의 탓으로 돌리면 ‘면피’ 정도는 될 터이니까.
지난 11일과 12일 오후 ‘중구 문화의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한글이 목숨”이라던 외솔 선생의 탄생 125돌을 기리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나흘(10월 9~12일)동안 열린 ‘울산 2019 한글문화예술제’의 분위기를 살피고 싶어서였다. 태풍의 영향 탓인지 예년보다 썰렁한 분위기가 거리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놀라운 장면도 시야에 잡혔다. 예술제 공연무대가 바로 코앞인 어느 식당의 차림표가 그것. 방어회 한 접시가 1만9천900원임을 알리는 <방어 사시미 19.9> 쪽지였다. ‘2019 한글문화예술제’ 포스터와 ‘한글날 특식’ 간판이 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연맹은 ‘파이팅’을 ‘아자’로, ‘계주’는 ‘이어달리기’로, ‘시합’은 ‘경기’로, ‘전지훈련’은 ‘현지훈련’으로 바꾸어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파이팅(fighting)’은 이제 울산바닥에서도 귀에 익은 말이 됐다. 단체사진이라도 찍는 사람은 으레 이 말을 꺼내며 한손을 치켜들라고 주문하는 게 예사였다. 요즘은 엄지와 검지로 ‘사랑(Love)’ 표시를 요구하는 게 대세이긴 하지만…. 여하튼 ‘파이팅’은 곁가지도 두어 개를 쳤다. ‘f’가 ‘h’로 둔갑한 ‘화이팅’ 혹은 사투리식 ‘하이팅’이 그것이다.
사실 ‘파이팅’에 대한 지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른 이유로 도마에 오른 적이 있었다. 영어 본딧말 ‘파이트(fight)’의 말뜻이 ‘화합’이나 ‘단결’이 아닌 ‘투쟁’을 부추기는 것이다 보니 국민정서 순화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한민국이 참가하는 국가대항전을 보러 외국 경기장까지 가서 ‘파이팅’이란 구호를 ‘떼창’하듯 외친다면 현지 외국인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 들겠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자.
앞서 티브로드 기자는 ‘파이팅’의 뿌리가 일본어 ‘화이또(ファイト)’라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 한글과는 달리 태생적 한계가 있는 일본어 발음과 이에 길들여진 일본인들의 짧은 혀로는 그런 발음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응원구호처럼 굳어버린 ‘파이팅’(혹은 ‘화이팅’, ‘하이팅’)이란 말을 어떻게 하면 멋지고 아름다운 순우리말로 바꿀 수 있을까. 한국체육기자연맹이 내놓은 ‘아자’도 그 중 하나일 수는 있다.
일본어 ‘화이또‘에서 곁뿌리를 내린 왜색 짙고 전투적인 응원구호 ’파이팅‘을 이 땅에서 추방할 때가 된 것 아닌가. 이 값진 일은 체육계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으면 한다. 이 운동을 울산시민들이 극일(克日)운동 차원에서 펼친다면 더 없이 좋지 않겠는가.
김정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