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섭이 들려주는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 이야기’ (7)
5. 바다부터 잃다
언제부턴가 조선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쏟아내 놓은 문명의 산물들을 놓고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면직물, 신발, 성냥, 손전등, 가방, 시계, 노트, 펜, 우산, 양산,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 약품들, 다양한 지식 서적들, 이러한 것들 외에도 거리에 켜진 전깃불과 한성과 부산 원산 간에 전선을 부설하여 통신혁명을 이룬 전신사업, 전차가 개통되어 이룬 교통혁명은 아직 중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들을 경이로움과 함께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선박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860년대와 1880년대 사이에 조선의 정세는 이미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자수호조규를 지나면서 어느새 조선의 바닷가에는 외국의 선박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개항장이 생겼고, 그것은 곧 조선의 법이 작용하지 않는 ‘조계지’가 되었다. 이곳을 통하여 이미 근대화를 이룬 서구와 일본의 공산품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우리의 바다에 설치된 등대는 외세의 화물선들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한 선박에 실어온 공산품들과 우리 산물은 가격 면에서나 질적으로도 경쟁이 될 수 없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이겠지만 해운에서도 문제는 심각했다. 전국의 개항항의 해상운송이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고, 그들은 불법적으로 비개항항까지 범위를 넓혀 해운활동을 하면서 이 땅의 근대 해운 발흥의 씨를 싹부터 말리고 있었다.
물밀 듯 밀려오는 외세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감지한 조선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방 외교 통상업무와 나랏일을 담당하는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새로운 정부기구를 두었다. 통리기무아문은 나라의 주요 현안을 담당하며 특히 대외 업무에 중점을 두고 업무를 진행했다. 그것은 다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칭되고 청나라가 추천한 묄렌도르프라는 독일인을 외교고문으로 두었다. 당시, 외교와 통상에 서투른 조선으로서는 적절한 조치였던 것 같다. 이 기구는 당시 정부의 여러 가지 현안을 심의하고 정책을 수행해나갔는데 그 중에서도 해운에 관련된 사업을 펼쳐나간 것은 문명개화와 식산흥업에 골몰하던 당시의 조정의 기류를 감안할 때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한국 근대 해운의 시작으로 보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관영해운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1883년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영국계 해운기업인 이화양행과 기선운항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의 상하이 간에 배선, 운항되던 선박을 조선의 부산과 인천을 경유하여 운항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조선 수역 근처를 운항하던 외국 해운기업의 취항 항로에 조선을 경유하도록 하는 항로 연장 방식이었다. 약 1년간을 운항했는데 결손을 본 이화양행은 운항을 중단했다. 그리고 결손금을 요청했는데 조선 조정은 이를 해결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다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독일계 기업인 세창양행과 계약하여 300톤급의 선박을 6개월간 용선하여 전라도 지역의 조곡(조세로 납부하는 곡식. 조선시대에는 남부지방의 조곡을 수운으로 운송했다)을 인천까지 운송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역시 기존 재래 조운(조곡 운송) 종사자들의 심한 반발로 조선 조정은 일방적으로 해약하기에 이르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관영해운의 실패 후에도 다시 한 번 관영해운이 시도되었다. 각 도의 조곡운송을 전담하는 기구인 전운국이 해운담당 부서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전운국은 선박을 구입하여 직접 운항하였다. 전운국이 구입한 선박은 모두 5척이었는데 선박도입 정보와 절차, 방식에 서툴러서 경제적 손해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구입한 선박 중 해룡호는 연료 효율이 많이 떨어져 당장에 처분해야 하는 선박이 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의 재정 사정으로 대개 외국차관으로 도입된 선박들은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아 소유 관계가 문제가 된 채로 운항되기도 했다. 전운국은 해운경영과 선박관리의 비효율성 문제 외에 자국 선원과 해기기술의 부재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높은 임금으로 외국인 보통선원과 해기사를 고용했기 때문에 운항비 부담이 커졌고, 그런 중에서도 조선인들이 해기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전운국은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선박 도입에 따른 차관상환 문제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때 청나라가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갖기 위하여 저리의 차관을 제시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청나라는 자국의 관官이 감독하고 민民이 운영하는 해운기업인 ‘초상국’의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에 조선은 최초로 민간이 운영하는 해운기업 ‘이운사’를 발족시켰다.
이운사는 전운국의 선박 외에도 1천 톤급의 당시 조선으로서는 가장 대형선을 도입할 만큼 활동이 의욕적이었다. 이운사는 일본으로부터 소형선 4척을 도입하여 국내 연안의 일반적인 운송 외에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도는 조곡운송에 종사하였는데 그 운항성과는 대체적으로 괜찮았다. 그렇지만 그 경영관리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는데 일선 실무에까지 관리가 배치될 만큼 지나치게 관의 간섭이 많았고, 경영진의 요직에는 조정의 실력자들 또는 연줄을 가진 인사들이 차지하여 효율적인 기업 경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운사나 전운국이 안고 있는 해운 운항 상의 난점은 무엇보다도 경영기법과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에 속하는 해기기술이었다. 해외로부터의 차관 과정, 용선 실무, 재무 회계에 어두운 조선의 관리와 실무자들은 불이익을 당한다든지 사기에 휘말려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선원의 경우 전문직인 해기사는 거의 일본 해기사로 채워졌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육상직원들의 업무 말고도 승선한 해기사들도 취급하는 재정 사무 관리가 많았는데 승선직원이 일본인들이니 업무협조 연계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운사의 선박들과 사업 일체가 이미 조선의 개항 항과 불법적으로 비개항 항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한반도 연안 운송의 독점운송을 도모하고 있던 일본의 해운기업인 니혼유센(日本郵船)에게 위탁하는 계약이 체결되면서 조선말의 관영해운은 막을 내리게 된다.
개항이 되고 수많은 이양선이 연안을 출입하며 무역활동을 벌이자 자연히 민民에서도 해운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경영에 흑자를 내어 성공한 기업은 드물었다. 대부분이 전자의 관영해운과 같이 차관으로 선박을 도입했기 때문에 자금 압박이 심했고, 외국인-대개 일본인-선원의 높은 급료로 인해 운항비 부담이 컸고, 해운경영 선박관리 미숙으로 적자경영에 시달려 결국은 헐값으로 선박을 매각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해운업체인 대흥상회가 운항한 대흥호의 취항과 매각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례인데, 적자 경영과 함께 자금압박에 시달린 대흥호의 선주는 선박의 공매 사실을 각 국 영사관을 통해 공고하였고, 인천 해관(오늘날의 세관)에서 공매되었다. 공매가 진행되면서 누군가의 획책으로 구입 선가의 10분지 1에 불과한 금액으로 낙찰되어 대흥상회는 결국 파산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