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버팀목
2014-09-17 울산제일일보
어릴 적 필자가 살던 강원도 산골 마을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강가 바위언덕 위에 청원각(淸遠閣)이란 효자각이 하나 있었다. 집 마당에서부터 효자각에 이르는 길과 효자각 주위의 눈을 모두 깨끗이 치우는 것도 어린 필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마당의 흰 눈은 대충 쓸어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 할머니께서 유독 청원각의 눈은 조금이라도 깨끗이 쓸어내지 않은 것이 들통 나면 크게 꾸지람을 하시곤 했다. “이놈아, 너희 아버지는 단지(斷指)까지 해 가며 이 할미를 살렸고 그래서 효자각이 세워졌는데 너는 어찌 돼 먹은 놈이 효자각 눈 하나 제대로 쓸지 못하느냐. 그래가지고서야 어디 효자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냉큼 가서 마저 쓸지 못하겠느냐. 이놈” 필자는 할머니의 추상같은 불호령에 한 마디 변명도 못한 채 꽁꽁 언 손을 비비며 댓 싸리 빗자루를 어깨에 메는 둥 마는 둥 둘러메고 청원각으로 내 달리곤 했었다. 그 당시에는 할머님이 몹시 원망스러웠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쩡쩡거리던 그 분의 불호령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 일까.
인간은 가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그 자존심을 다시 날카롭게 세울 수 있는 그 뭔가가 있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하나 쯤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필자에게는 청운각이 바로 그런 존재다. 필자는 대학입시에서 낙방해 재수를 했을 때와 군 복무 3년을 마치고 돌아와 복학한 뒤 약사고시에 도전했을 때가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 마다 필자를 지탱시켜주고 잡아준 버팀목이 바로 청운각이었다. “청운각! 아, 그래 네가 누구냐. 효자의 아들이잖아. 아버님 얼굴에, 고향 명예에 먹칠 할 순 없잖아. 안 돼. 암,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나는 효자의 아들이야” 살면서 어려울 적마다 필자는 이런 소리를 속으로 되 내이곤 했다.
<류관희 전 강원도민회장·유영당 약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