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의 ‘사택’과 짝꿍
2013-08-27 울산제일일보
한번의 세찬 여름소낙비로 무더운 더위가 수그러들었다. 높은 하늘을 쳐다보면 창공에 흰 구름이 둥둥 떠내려간다. 아니 이렇게 좋은 날씨라면 어느 누구도 좋은 삶이 될듯한데 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울산대 내에 ‘사택’이 있었다. 우수한 교수진들을 위한 개교 당시의 특별한 배려 차원에서 지어진 것이다. 이제는 그들 나름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곳에 둥지를 틀어 옹기종기 살면서 아이들은 자랐고 그 아이들이 성인이 돼 독립한 의미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즐거웠고 정이 푹 들은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떠나고 없는 자리에, 학생들을 위한 큰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무엇보다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의 추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터가 될 것이다.
대구는 일찍이 일제 강점기부터 방직산업이 어느 도시보다 발전되어 있었다. 몇 개의 방직회사가 모여 있는 동네에는 제각기 독특한 ‘사택’이 있었다. 필자가 살던 곳도 그 중 하나다.
꼬마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제법 멀었던 것 같다. 사택 밖으로 나와 ‘긴 담장’을 옆으로 둑을 거쳐 ‘굴다리’를 지나 걸어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옆에는 또 꼬마가 다녔던 갈색 벽돌의 ‘칠성병원’도 눈에 아른거린다. 조금 더 가면 전매청. 그곳에서 뿜어 나오는 ‘하얀 김’을 쳐다보면서 학교 정문에 도착한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면 이 꼬마는 얼른 집으로 돌아와 무엇을 하면서 놀 것인지 궁리한다.
꼬마가 살고 있던 ‘사택’은, 굉장히 넓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가로 세로 직경 십리 정도까지 상상했으니 말이다. 또 그땐 친구들이 유난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특별히 운동장은 필요 없다. 사택 한가운데가 그들의 야구장이고 놀이터가 되었으니까.
그 안에는 호기심 나는 ‘구멍가게’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영철이 할아버지 가게. 그 할아버지는 귀 뒤쪽에 큰 혹이 달려있어 ‘혹부리 영감’이라고 불렸다. 또 하나는 꼬마가 단골로 다니던 구멍가게. 손에 쥔 돈은 없었지만 고마들은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오늘은 또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나 하고 말이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늪지’도 보인다. 웬 잠자리가 그렇게 많고 큰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놈들은 ‘왕잠자리’였던 거다. 아무것이나 막대기에 달고 휘두르면 그 놈은 확 달라붙는데 곤충채집하는 도구로는 최고였다.
사택이라는 말이 나오면 무엇보다 초등학교의 ‘짝꿍’이 생각난다. 산수책 한 권을 둘이 같이 보면서 공부했으니 더욱 재미났다. 어느 날인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꼭 우리 교회에 와줘!”라고 졸라대는 짝꿍의 말도 귓가에 아른거린다. 그 소리에 꼬마의 마음은 더욱 두근두근한다. 게다가 짝꿍의 엄마가 말하는 상냥한 ‘서울 말씨’를 그는 결코 잊지 못한다. 이런 것들이 사투리를 쓰는 꼬마에게는 늘 신기하게 느껴져 그녀의 집 앞으로 지나는 것을 마냥 재미있어 한 것 같다. 그 아이가 무엇을 하면서 노는지, 어떻게 생활해 가는지 너무 궁금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아담한 시골집까지도 눈에 선하다. 그 대문 천장 모서리를 보면 ‘제비들’이 들락거린다. 둥지안의 새끼들이 조잘대고 있는 모습은 참 정겨운 느낌이다. 게다가 대문 밖에 있는 갖가지 채소밭이 뜨거운 햇살에 쪼이고 있다.
구석진 곳에는 ‘볏짚’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고 그 옆에는 좀 시끌시끌한 ‘돼지우리’가 있다. 한때는 어미돼지가 새끼 12마리까지 낳아 꼬마가 놀란 적이 있다. 토실토실하게 생긴 놈들이 그냥 어미젖을 이열횡대로 다닥다닥 붙어 빨아댄다. 모습만 보아도 꼬마의 마음은 마냥 풍성한 느낌이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M.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유년기처럼, 잠시 필자의 유년기로 돌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본다.
무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 누구든 각자의 잃어버린 어릴 때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동시에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잊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