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최대산지 ‘옹기울산’ 알리고
생활보급 확대로 조상 지혜 전수”
"전국최대산지 ‘옹기울산’ 알리고
생활보급 확대로 조상 지혜 전수”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3.07.0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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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수 울산옹기박물관장
▲ ‘기네스 인증 최대 옹기’ 앞에서 미소를 짓는 윤종수 옹기박물관장.

지난 6월 1일자로 초대 울산옹기박물관장의 중임을 떠맡은 윤종수 전 울산시교육위원회 의장. 올해로 만68세지만 ‘만능 스포츠맨’답게 노익장의 기(氣)가 넘친다. 부임 1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 내 박물관장실에서 그를 대면했다.

“쉬고 싶었는데 하도 권하는 바람에 그만 수락하고 말았지요.”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울산옹기축제(전 울주옹기축제) 추진위원장 직만 해도 내리 5년째다(2008∼2013).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맡고 있으니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했다. 울주군에선 그의 다양한 교육계 경력과 원만하고 성실한 성격, 폭넓은 교우관계에 방점을 찍은 것 같았다.

옹기박물관(전 옹기문화관)의 수장 직은 대충 넘어가도 되는 자리가 아니다. 감당해야 할 일이 박물관 업무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관, 마을안내센터(옹기마을역사관)는 물론 옹기축제 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이왕 맡겨진 책임이니 마음을 다잡아 최선을 다하기로 작심했다.

“우리 울산 옹기, 전국 생산량의 절반이나 안 됩니까? 전국 최대의 옹기 집산지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옹기전문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옹기마을만의 특화된 프로그램 운영으로 내실을 다져 나갈 겁니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지난 달 25일 성사시킨 옹기축제추진위는 지난 달 25일 울산옹기연구소 김미옥 소장(아카데미 제2관 운영자)과 맺은 ‘홍보사업을 위한 업무협약’이다. 울산 옹기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통옹기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생활옹기 아이템을 개발·보급하는 일에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옹기를 주제로 한 교육·체험사업의 추진, 옹기기념품의 개발·보급, 박물관 전시의 기획·유치, 옹기 학술정보의 교환·교류도 그 속에 들어간다,

소장품 전시회, 국내 유수작가 초대전 같은 수준 높은 기획전도 김 소장의 도움으로 자주 마련할 계획이다.

윤관장은 옹기의 생활화 즉 ‘생활옹기’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대단하다. 진열대에서나 볼 수 있는 전시용 옹기가 아니라 생활 속 뿌리내린 실용적 옹기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강길부 의원 아이디어지만, 아파트 베란다 한 구석을 ‘미니 장독대’가 차지한다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까? 조상들의 혼이 담긴 전통옹기의 위대함을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옹기로 채워진 ‘반상기 세트’를 만들어 보급하는 사업, 방문기념 선물용 옹기를 만들어 기업체나 행정기관에 보급하는 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다. 재임 중에 꼭 해낼 참이다. 이 모두 울산 옹기의 우수성을 안팎으로 널리 알릴 수 있는 효과적인 홍보사업의 하나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 지난 6월 25일 오전 옹기박물관 1층에서 업무협약을 마친 뒤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에 나선 김미옥 옹기연구소장(앞줄 왼쪽)과 윤종수 옹기박물관장(앞줄 오른쪽).

윤종수 관장은 ‘울산옹기축제 추진위원장’ 직함보다 ‘울산시교육위원회 의장’ 직함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초선 교육위원(2008.9∼2010.8)이면서도 임기 중 부의장(전반기), 의장(후반기 2년) 직까지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교육위원 출마 전까지는 울산대학교 학사행정 분야(2000년, 체육진흥실장)에서만 31년간이나 몸담은 ‘울산대 맨’이었다. 숨은 일화가 있다. ‘2계급 특진’ 이야기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울산대는 총학생회가 주도하는 학생 소요(데모)로 곧잘 몸살을 앓았다. 울타리가 없어 경찰과 대치·충돌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천병태 시의원, 김종훈 동구청장, 김진석 통합진보당 울산남구위원장이 시위 대열에 앞장서던 시기였다. 대학 측은 경찰과의 충돌을 막기 위한 묘안을 궁리했다. 대학 주변 땅(현 대운동장 터)의 매입에 적극 뛰어들기로 했다.

“제가 총대를 멨지요. 이후락(HR)씨(제3공화국 실세, 전 중앙정보부장, 전 울산대 이사장)의 부인 정윤희씨 명의로 된 땅이었는데, 그 일로 경기도 이천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HR을 직접 찾아가 설득을 했어요.”

처음엔 반응이 냉담했다. 호가보다 너무 싼 값을 요구한 탓도 있었다. 끈질기게 매달린 덕분에 마침내 매매가 성사됐다. 1984년 10월의 일이었다. “‘평당’ 50만원 부르는 땅 830평을 9만원씩에 사들였으니 학교에 큰 공을 세운 셈이지요.”

옹기박물관장 취임에 때맞춰 10여년간 멀리 했던 테니스 라켓을 다시 잡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S-OIL 직원사택 내 테니스코트에서 울산대 선수 출신 사범한테서 ‘레슨’을 받는다. 44세 때 배웠지만 테니스라면 한때 잘 나가던 주특기 스포츠였다. 전국 동호인 시합에서 준우승도 했고 울산 동호인 모임의 명예회장 직을 맡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 공이 잘 안 맞아요. 라켓을 21년만에 모처럼 잡다 보니 공이 제멋대로 날아다녀서 중심 맞추기도 힘들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 딱 그대롭니다.”

윤 관장은 청소년 시기, ‘운동에 도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남창중학교에선 1학년 때부터 축구선수였고 남창고등학교 학생 땐 경남도민체전에서 ‘넓이(너비)뛰기’ 준우승도 차지했다. 방어진초등학교 교사 시절엔 주전선수로 활약하면서 울산 초중고 교사 체육대회에서 배구 우승컵을 3년 내리 휩쓸기까지 했던 터였다.

운동에 빠져있다 보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삼평초등학교 다닐 때는 반 아이 18명 중 꼴찌를 했고 남창중학교에 진학해선 반원 45명 중 43등을 했다. 뒤늦게나마 공부에 눈 뜬 것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라던 부산 형님의 간곡한 권유 덕분이었다. ‘구구단’을 외운 것은 중3 때였고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고 했다.

골프는 ‘싱글’ 수준. 전국교육위원회의장단 회동 땐 ‘최대 비거리’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약주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가까이 한다.

이틀 터울 동갑내기 부인 박화자 여사(2000년 대한민국 근정포장 수상, 울산서예협회 초대작가)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진주교대-동국대(경주)를 졸업했고 제8회 울산시 문화상(2005), 제22회 울주군민상(문화체육부문, 2013) 수상 경력이 있다.

김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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