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보고 둔황(敦煌)
불교문화의 보고 둔황(敦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6.2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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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황의 서천불.
간쑤성 란저우에서 하서주랑을 따라 서쪽으로 10여시간 달리면 둔황이 나온다. 둔황은 과거 중국의 서쪽 끝 변방이면서 실크로드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동서 문화가 활발하게 이뤄진 지역이다. ‘둔황’의 ‘敦’은 ‘크다’, ‘煌’은 ‘무성하다’의 의미로 성대하고 휘황찬란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명칭에 걸맞게 둔황에는 찬란한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특히 한나라 때 인도와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문화가 천년 세월을 축적해가며 꽃피운 둔황 막고굴은 불교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시내에서 동남쪽 25㎞에 위치한 막고굴은 허난 뤄양의 용문석굴, 산시 다퉁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 중 하나로서, 석각 위주의 운강, 용문과 달리 벽화와 소상(塑像)이 특징적이다.

막고굴은 동굴 벽면마다 천 개의 부처가 그려져 있어 속칭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전진(前秦)시대인 366년 처음 만들어져 북위, 북주, 수, 당, 오대, 송, 서하, 원을 거치면서 천년동안 각양각색의 동굴 735개와 벽화 4만5천㎡, 채색 조소 3천여개가 만들어졌고 중국 고대사회의 예술사와 경제, 문화, 종교 등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석굴예술의 보고이다.

160위안이라는 다소 비싼 입장료를 지불한다. 막고굴은 벽화의 채색 변조 방지와 유물 보존을 위해 사진촬영은 금지되고 소지품도 보관해야 하며, 단지 외관만 촬영이 가능하다. 보통 8개 정도 구경하는데, 운이 좋으면 11개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매년 개방하는 동굴이 바뀌는데, 그 이유는 관람객들의 호흡으로 인한 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중 눈에 띄는 곳은 17굴인 장경동(藏經洞)이다. 1900년 경 막고굴을 관리자가 청소를 하던 중 16굴 틈새로 안쪽 17굴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수만권의 불경을 위시한 문서·불기구, 불상 등 엄청난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강창문학의 효시로서 이후 송대 화본소설에 영향을 끼친 귀중한 자료인 변문도 발견됐다. 또 우리나라 신라시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바로 이 장경동에서 발견됐다.

장경동 보물 발견 당시, 헝가리계 영국인 슈타인과 프랑스인 펠리오, 일본의 다이가쿠 오타니(大谷), 미국의 워너 등이 보물들을 해외로 반출하면서 많은 양의 국부가 유출됐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들 네 명을 중국 4대 도적이라 표현한다. 발견 초, 중요성을 모르고 동굴 안에 거주하며 밥을 지어먹어서 벽화가 새까맣게 그을리는 등 보존이 기막히게 허술했다. 후에 중국정부는 막고굴의 중요성을 알고 지금까지 엄격한 관리를 해오고 있다.

이번에 참관한 동굴은 16, 17, 96, 130, 140, 148, 231, 251, 259, 340, 427동굴이었다. 그중 340석굴 벽화에는 반바지에 투명치마를 입고 가방을 든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반바지 입은 불보살 모습도 인상적이다. 16굴에는 서하 시절 벽화가 있는데 손전등을 벽 아래에서 위로 비추자 그림 윤곽이 입체적으로 나타났다. 그 예술적 가치의 크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밖에 둔황의 상징인 비파를 거꾸로 타는 여인을 그린 벽화, 96동굴의 대불상, 148동굴의 커다란 와불상도 눈길을 끌었다. 대불상에는 당 왕조 시기 측천무후가 자신의 현세안온과 사후를 위해 자신의 불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막고굴의 불교예술문화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며, 당시 천 년간에 걸친 벽화를 통해 과거의 의복, 음악, 악기, 생활습관, 건축양식, 미술기법, 조소 등의 특징과 변천사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을 직접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엄청나게 큰 규모와 함께 아름다운 예술미는 지금도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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