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팽개친 천혜, 뒷동산과 영남알프스
내팽개친 천혜, 뒷동산과 영남알프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6.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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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구릉
울산이라는 도시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대다수의 시민들은 산과 강과 바다 모두를 두루 갖추고 있는 울산의 자연환경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도심에서 불과 20㎞ 남짓한 거리에 위풍당당하게 솟아있는 산들을 자랑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천m를 훌쩍 넘는 봉우리가 일곱 개나 있으며, 그것도 산맥을 이루고 있는 곳은 국내에서 울산 외에는 따로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의 고봉준령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문자 그대로 ‘천혜(天惠)’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 봉우리들이 평지와의 높이 차이를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강원지역과는 달리 해발 불과 수십 미터 내외의 평지에 솟아 있어 그 웅장한 스케일은 가히 압권이다. 실제로 울산 도심에서도 날씨가 맑은 겨울날 오전에 흰 눈을 이고서 햇살을 안고 있는 영남 알프스 준봉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풍경을 접하면서 이 위대한 자연 자산을 도시디자인에 활용하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자연스레 고민해 보게 된다.

학창시절에 우리나라는 산지가 70%인 산악국가라고 배웠다. 사실 어디를 가나 산이 눈에 들어오고 그 때문인지 산과 유리된 생활은 생각하기 힘들다. 이런 풍토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필자는 일본 도쿄에서 보냈던 지난 2003년 봄에 심각한 산 금단증상을 앓았던 적이 있다. 도쿄는 산이 없다. 맑은 날이면 직선거리로 100㎞ 가량 떨어진 곳에 솟아있는 후지산 봉우리가 조금 보이긴 하나 도쿄 도착 후 두어 달 동안 바다와 공원, 그리고 빌딩들만 보다보니 심리적으로 우울하고 불편했다. 처음엔 알지 못했으나 자꾸 산이 그리워지는 맘을 알게 되면서 늘 발걸음을 옮겼던 문수산이 있는 울산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할 수 없는 노릇이라 꾹 참고 대신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주말을 이용해 도쿄에서 2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하코네(箱根)에 가서 산에 오르고 산 속의 공기를 실컷 마셨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우울했던 증상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도쿄에 자연이 적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면적이 십여만평 이상 되는 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이 여럿 있다. 이런 숲이야말로 도시민의 정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산과 함께 살아 온 한국인들에게는 이런 세련된 도시공원보다 마을 인근의 야산이 훨씬 더 훌륭한 공원 기능을 한다는 것을 다시 되새기게 됐다. 이 같은 경험은 우리나라의 산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산이 시민들을 품게 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다. 바로 둘레길 정비다. 지난 2007년 9월에 제주 올레길 1코스가 개통된 이래 지리산 둘레길 등 전국적인 둘레길 조성 붐이 일고 있다. 울산도 제주 올레길과 같은 해인 2007년부터 남구 ‘솔마루길’ 조성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많은 둘레길과 어울길이 정비됐다. 이제 울산시민이라면 누구나 휴일 아침에 집에서 나와 지인들과 이런 길을 함께 걸으며 이구동성으로 ‘도심 가까이에 산이 있어서 정말 좋다’고 말하게 됐다. 걷는다는 점에서만 본다면 이런 산길은 잘 정비된 세계적인 어떤 유명공원에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길도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아이디어와 그것을 실현시킨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결집된 결과라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단체장의 의지와 관련부서의 노력, 흔쾌히 땅을 사용하도록 협조한 지주들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도시디자인이라는 틀에서 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선사시대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산을 피난처로 생각하고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성산(聖山)으로 신라시대부터 제사를 모신 기록이 있는 우불산(于弗山)이 그렇고 굴아화(屈阿火)의 성산이자 신라시대 불교의 성지였던 문수산도 이런 범주에 든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고을마다 진산(鎭山)이 있었다. 조선 초기 기록에 각 고을의 진산이 보이므로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울산의 진산은 무룡산, 언양은 고헌산, 경주는 남산 같은 식이다. 그리고 풍수에서는 형국론이나 주산, 조산 등의 개념에서 산과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현대사회에서도 학교 교가에서 특정 산을 노래하는 것을 통해 산이 가진 상징이나 대표성을 찾아볼 수 있다. 산을 바라보는 이런 관점은 결국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의 산에 의미를 부여하고, 산과 나의 관계를 설정하며, 평소 바라보는 산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던 것을 웅변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현대인도 산이 주는 여러 혜택과 영향을 받고 있다. 산과 숲에 조성된 둘레길이나 어울길이 좋은 예가 되는 것은 물론, 시각적인 편안함, 정서안정, 깨끗하고 맑은 공기, 휴식공간, 레크리에이션 장소 등 그 이점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산을 활용하는 도시공간 조성을 고민해 볼 때가 됐다. 즉, 도시개발과 산을 조화롭게 디자인하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울산의 경우 시가지를 에워 싼 산지 대부분이 자연녹지이면서 공원으로 지정된 곳이 많아 사실상 개발이 어렵다. 시가지에서 약간 멀리 있는 산이라 하더라도 주거지역이나 공업지역이 아니라면 개발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게다가 산을 필요한 곳에 옮길 수도 없으므로 도시공간을 산에 맞추는 디자인이 필요해 진다. 우리나라 도심에 인접한 산은 외국 도심의 거대한 숲이 평지에 펼쳐진 것과 달리 수직으로 서 있는 숲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대가 낮은 도심에서도 잘 보이는 반면 가려지면 그 의미는 사라진다.

이런 관점에서 도시를 산에 맞추는 디자인의 초점은 첫째, 바라보는 대상인 산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산과 도시공간의 관계를 보다 강하게 설정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는 도심 인근의 산일수록 형질 변경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자본과 기술의 제약으로 대규모 빌딩이 세워지지 않아 산을 가리는 인공 구조물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자본과 고급기술의 뒷받침으로 대규모 건축물이 산을 막는 것은 물론 쉽게 없애버릴 수 있는 삭막한 시대가 됐다.

이런 가운데 도시공간에서 산을 가리는 가장 큰 원인을 대규모 고층 아파트단지에서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이런 단지는 도심외곽의 녹지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아 도시에서 산을 바라볼 수 없게 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차고 맑은 공기의 유입을 막으면서 도심의 오염된 공기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울산의 경우 중구 구시가지는 북쪽 혁신도시까지 서너 겹의 고층 아파트단지가 가로막게 됐고, 남구는 문수산 일대와 신선산일대가, 울주군 역시 문수산 일대가 고층아파트로 가로 막혀 버렸다. 또 울산도심에서 녹지벨트를 이루고 있는 남산의 은월봉에서 바라보이는 무룡산과 학성산, 그리고 학성공원과 태화강도 고층아파트단지와 주상복합아파트로 시선 축이 막혀 버렸다. 언양읍성의 경우 읍성 내에서 진산인 고헌산이 고층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지 오래다. 이처럼 산지와 구릉이 시가지를 감싼 울산이지만 도심에서 주변 녹지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게 됐고 그 결과는 도시의 지역성과 개성마저 사라지게 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 극복을 위해 기존 시가지의 경우 광장이나 도로 축을 무룡산이나 문수산, 함월산 등에 맞춰 재조정하는 장기적인 도시디자인 전략이 필요하다. 또 새롭게 개발되는 도심외곽이나 울주군 지역의 경우에도 진산인 무룡산이나 고헌산, 주산인 함월산, 그리고 잘 알려져 있거나 주민들의 생활과 관련이 깊은 남산, 대운산, 우불산, 남암산, 정족산 등의 산봉우리를 가리지 않게 하는 것은 물론, 이런 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시디자인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 도심에서 산이 더 잘 인식되고, 산이 주는 축복을 보다 많은 시민이 오래도록 누리게 할 필요가 있다.

<울산대 건축학부 교수·울산교총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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