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살 골목길은 시민공감의 원천
600살 골목길은 시민공감의 원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6.09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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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옛길의 도시디자인
한삼건교수의 도시이야기
▲ 옛 항구 기억을 살린 영국 런던의 아파트디자인.
작가 밀란 쿤데라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상대를 말살하려면 그들의 기억을 지워버려야 한다”고 했다. 과거의 기억이 없으면 결국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저토록 과거사를 왜곡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주장으로 바른 기억을 덮어버리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억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도시도, 민족도 사라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필자가 울산의 도시역사를 공부하자고 부르짖는 이유는 집단 기억상실에 걸린 도시에게서는 미래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나친 옛길의 흔적

▲ 울산 옛가도 우정동 성황당 부근

지난 2010년 4월에 시민연대 도시학교 회원들 및 울산시청, 중구청 관계자들이 모여 중구 북정동, 교동, 옥교동, 성남동 일대의 옛 울산읍성 성벽터 바깥 길을 찾아 ‘읍성길’이라는 글씨를 길바닥에 페인트로 새기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이 작업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이 허물어버린 울산읍성 성벽의 위치를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주고 나아가서 기억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벽 자리 하나가 중요해서 라기보다는 울산읍성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시민들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글자를 새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필자가 여러 차례 학생들을 인솔해서 이 골목길을 답사하고, 시민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설명을 해도 필자의 안내가 없으면 대부분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런 특징도 없고 안내판 하나 없는 복잡하고 허름한 골목길에서 길을 잃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살고 있는 이들도 그 의미를 모르는데다가 걸어다는 행인도 보이지 않아서 길 찾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학자나 연구자만 아는 길이 아니라 시민이 함께 알고, 함께 그 길의 미래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모아져서 이름표를 붙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중구청에서 더욱 선명한 큰 글씨를 써 넣었고, 군데군데 안내판도 세워서 이제는 울산읍성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게 됐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건축 공부를 하고 있는 울산 출신 학생이 필자의 연구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학부과정부터 프랑스에서 공부한 그 학생은 석사과정에서 자신의 집이 있는 울산 동구를 연구해 보겠다고 하면서 도시모습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니 도와 달라고 했다. 대화를 통해 그 학생의 관심이 옛길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몇 지도와 항공사진을 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집 주변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작업한 논문을 펼쳐 보이는데, 건축을 공부한 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롱샹교회가 처음 지어졌을 때인 1955년 무렵의 풍경을 복원한 것이었다. 이미 둥치가 잘려나간 나무 한그루 한그루까지 찾아내고 분석한 논문이었다. 불어를 모르는 필자이지만 잘 표현된 그림만 보아도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인지 그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일본의 주택단지에서는 이런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구마모토와 시모노세키시에는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아파트단지가 여럿 있어서 학생들을 인솔해서 가끔 견학을 간다. 유명작가의 작품이지만 이들 아파트는 모두 지방자치단체가 공급한 임대주택으로 말하자면 서민용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전에 있던 성냥곽 같은 판상형 아파트를 철거하고 재건축한 것인데 단지설계를 할 때 철거된 옛 단지의 길을 새로 지은 단지에서도 그대로 계승한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남겨진 길을 통해 단지의 기억을 이어주고 이곳에서 살아왔던 이들의 추억을 되돌려 주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파트단지 디자인 방법을 채용하는 이유는 재건축으로 옛 건물이 모두 철거돼도 주민들이 함께 기억하는 장소를 남겨둠으로써 공동체가 약화되는 것을 막고 안심이 되도록 해서 공동체를 굳건히 하는데 있다.

▲ 교동 목살골목 강정샘과 정정도랑이 있던 곳.

도시 정체성 지키는 추억의 장소

그렇다면 도시 스케일에서도 이런 방법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도시의 주민 한 사람을 두고 보면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관련된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것을 남길 수 있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종이에 글을 쓰고, 돌에 글을 새기는 방법이 있었다. 지금은 발달된 디지털 기술을 구사한 각종 텍스트, 음성, 영상 파일과 재생장치를 이용하면 사람은 죽더라도 더 많은 무언가를 남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런 뛰어난 기술로도 실체를 남길 수는 없다. 도시적 스케일에서 시민의 집단기억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방법으로는 장소를 지키고 건축물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 중에서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옛길을 지키고 이것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것은 도시의 정체성을 지키고 시민의 자긍심을 높여서 튼실한 공동체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은 지정 문화재와 관련한 정부의 노력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울산의 경우 선사유적을 비롯한 다양하고 많은 유적분포로 오랜 세월동안 선인들이 생활을 꾸려온 지역이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적어도 천년 이상 이어져 온 옛 길을 도시 여러 곳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다만 지역을 연결하던 대로는 국도와 같은 큰 도로로 바뀌고, 골짜기를 지나던 많은 길은 공업용수와 식수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져 갔다. 도심에 있던 여러 길도 이미 100년 이상 이어져 온 각종 개발 사업으로 끊어지고 파묻혀 없어졌다. 이런 상황이지만 아직도 도심과 외곽에는 옛길이 군데군데 남아 전해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오랜 옛길은 아니더라도 울산공업센터 개발 이후에 조성돼서 시민들의 기억을 담고 있는 길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길도 2000년대 이후에 접어들면서 대규모 재개발, 재건축 사업으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이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울산지역의 중심이었던 중구일대에는 적지 않은 옛길의 흔적이 있어서 이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가는 태도가 요구된다.

▲ 교동 목살골목 강정샘과 정정도랑이 있던 곳.

역사적 옛길 지키고 알려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울산지역에 소재한 각 성터의 길을 살리는 도시디자인이 필요하다. 중구 병영성과 울산읍성, 울주군 언양읍성 내부의 골목길은 대부분 600년 정도의 시간이 축적된 일종의 하드디스크 같은 존재다. 이것을 현재의 개발방식으로 그냥 없애버린다면 600년 기억을 말살하는 행위가 된다.

다음은 이들 성곽에서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옛길을 지킬 필요가 있다. 중구 북정동 동헌에서 지금은 넓혀진 장춘로를 따라 동쪽으로 나가면 읍성 동문지가 있다. 여기서 복산초등학교를 지나서 예전에 제일중학교가 있던 자리인 제일아파트까지 가면 ‘계변고개길’이 나타난다. 이 길과 울산고등학교 앞의 ‘도화골 15길’은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연결하던 오랜 옛길이다. 무언가 도로에 설명과 표지판을 설치하면 좋을 것이다.

울산읍성에서 서문을 빠져 나가서 태화나루에 이르는 길에도 옛 모습이 남아 있다. 교동과 우정동, 성남동이 만나는 위치에 울산수협 성남동 지점이 있는데 그 앞길은 도로이름도 없지만 조선시대의 간선도로다. 이 길은 성남동과 우정동의 경계를 이루면서 이어지는데, 성남시장 자리에 있던 연지(蓮池)라는 큰 연못가를 지나갔으니 경치도 좋았을 것 같다. 이 길은 도중에 ‘중앙3길’과 ‘당산1안길’로 이어지는데, 조선시대 울산성황당이면서 지금은 강정마을 당수나무인 회화나무 노거수도 지나고 옛 태화동사무소옆 이팝나무도 지나간다. 이 길은 마제스타워아파트로 막혀버렸지만 태화루와 태화나루, 울산고을 사직단, 효자 ‘송도비각’을 비롯한 열녀비, 선정비 등이 서 있었으니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간선도로임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유서 깊은 길도 앞으로 주택재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모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아파트단지를 계획하고 도로와 공원 같은 새로운 기반시설을 도입할 때 어떻게 하면 이런 길을 보존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길은 읍성길에서 보았듯이 우선은 이름표를 달아 줄 필요가 있다. 주변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화려한 디자인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선 주민들이 어느 길이 옛길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이름표를 달아주는 것이 급선무다. 그 다음은 길에 대한 설명을 적은 안내판을 세우고 이어서 길을 디자인하거나 살려 나갈 방법을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면 좋을 것 같다. 길과 함께 길가에 있던 여러 시설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이전한 제일중학교와 학성여자중학교, 울산여자중학교를 비롯해서 우시장, 교육청, 초대 울산시청사, 울산극장, 세무서, 상공회의소, 울산역 등등 수많은 시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민에게 알려준다면 울산시민의 집단 기억은 더욱 다채로워질 것이고 이것은 도시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 틀림없다.

<울산대 건축학부 교수·울산교총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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