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들의 슬픔
낡은 것들의 슬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5.26 19: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웨엥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어라!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가 더 가까운데서 들렸다. 게다가 현관 앞까지 시끌벅적했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사다리차가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다. 앞집이 이사를 가는 중이다. 봄인데다 오래된 아파트라 주말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웃이 이삿짐을 내릴 때마다 나는 좀이 쑤신다. 사다리차가 보이면 이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한 아파트에서 십여 년 넘게 살았으니 오죽하겠는가. 그 전에는 운 좋게 오년, 길면 칠년 정도 살다가 옮겨 다녔는데, 내가 붙박이로 사는 동안 앞집은 두어번 주인이 바뀌었다. 어쩌다 모델하우스라도 보고 오는 날이면 내가 사는 아파트가 더 우중충해보였다. 목욕탕엔 군데군데 물때가 끼었고 벽지도 누렇게 바래서 청소를 아무리 해도 어지간해서는 때깔이 나지 않았다. 집 전체가 화장을 해도 감춰지지 않은 쭈글쭈글한 상늙은이 꼴이라고 할까.

앞집은 수리 중이고 문도 열린 터라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다. 두 모녀가 삼년을 살다 이사 나가서 그런지 집은 아직 깨끗했다. 청소만 하고 들어와 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보름 가까이 드릴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루는 쓸 만한 화장실이 흔적도 없이 뜯겨져 나가고, 변기며 세면대가 헌신짝같이 버려졌다. 인부들조차 아깝다며 혀를 끌끌 찼다. 어떤 날은 깨끗하고 수수하던 벽지가 화려하게 탈바꿈을 했고 싱크대를 통째로 들어내던 날도 있었다. 현관 중문도 사정없이 내쳐졌다. 아파트 내부는 누군가 살았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숫제 개조 중이었다. 얼굴로 치면 전면 성형이랄까. 앞집은 원판의 흔적이 사라진 성형미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묻은 버려진 물건들을 보며 몇 년 전 파리에서 본 세느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을 따라 늘어선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없었더라면 세느강은 흔하디흔한 그저 그런 강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건물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세느강과 함께 흘러왔고 역사가 되고 명소가 되었으리라. 파리 중심가에 자리 잡은 건물은 리모델링 한 곳이 많았다. 아파트도 이백년 넘는 곳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내부는 그대로 두고 외간만 조금씩 고쳐나가는. 흔적이 숨 쉬는 곳, 파리는 낡은 것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는 도시였다. 도심 전체가 기품이 있어 보였다.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품위를 갖춘 노부인 같은.

결혼 초, 시댁에 가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었다. 주택이기도 했거니와 밖에 있는 화장실엘 갈라치면 남편을 앞세우고 볼일을 봤던, 주방도 불편해서 명절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던 기억이 있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던 시아버지가 삼십년 넘도록 그 집에 왜 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연로하신 아버지와 집이 똑같이 낡았다고 흉을 봤다. 집에 대한 나의 불편함을 남편은 애틋함으로 대신했다. 이 집에서 내가 태어나고, 여기가 내 방이었다며 추억을 더듬었다. 애석하게 나는 그런 나만의 역사가 없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으니.

돌아보니 결혼 햇수만큼 주변은 낡고 오래된 것 투성이다. 집만 아니라 옷장의 옷들도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장롱을 차지하는 두툼한 옷은 나이 먹어 살 찐 중년 아줌마와 흡사하다. 결혼 초 샀던 침대도 골골거리는 내 몸처럼 여기저기 삐걱거린다. 베란다를 가리는 버티컬은 군데군데 헤져서 더 이상 집을 아늑하게 감싸지 못한다. 주방의 그릇이나 냄비도 이가 빠지거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것들이 제법 있다. 오래된 책도 남루하긴 마찬가지다. 자잘한 글씨, 햇볕에 누렇게 바랜 장정, 책 속의 스토리마저 진부하고 촌스럽기 그지없다.

사람도 늙고 병들면 요양원이란 요상한 곳으로 헌 짐짝처럼 내쳐지기 일쑤인 요즘, 화사한 봄 햇살에 낡은 것들은 기를 못 편다. 나는 한술 더 뜨며 그것들을 버리지 못해 안달이 나고. 어느새 앞집 드릴소리가 잦아들었다. 머지잖아 우리 집은 더 낡아 보일 것이다. 아이 하나 둔 젊은 새댁과 단장한 앞 집, 우중충한 집과 쉰을 넘겨서 쉬어버린 밥 같은 나.

봄볕이 깊숙하게 거실에 내리자 사물들이 일제히 두런두런 거린다. 녀석들은 주인 손때가 묻어도, 기품이 없어도 좋으니 새 것으로 바꿔달라고 아우성이다. 나는 그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것들과 내가 똑같이 늙어가는 줄 모르고 나는 오늘도 낡아빠지고 오래된 것들을 버리고 또 버린다.

<박종임 수필가>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