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5.2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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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중에 레미콘 차량의 유리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노조 관계자들의 행동이 아닌가.”

지난 14일 시청 프레스센터에서 레미콘 노동자들의 파업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노동·시민단체들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나온 어느 기자의 질문이다.

이날 오전 중 교섭을 촉구하는 레미콘 노동자들이 현장 진입과정에서 몸싸움 등의 실랑이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차량에 대한 파손이 있었다. 장시간 노동에 대한 대책 마련과 적정 운송비를 요구하는 단체협상을 내세우고 울산의 레미콘 노동자들이 파업을 진행한 지 50여일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단체교섭에 대한 사측의 무관심으로 전혀 대화조차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불상사(?)였다. 레미콘 노동자들은 ‘나무(차량 파손)가 아닌 숲(파업사태의 장기화와 레미콘 노동자들의 처지)을 보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지역의 다수 언론은 차량파손문제를 크게 부각시켰다. 전국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을의 분노’, ‘을의 반격’이 아직 지역 언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음이다.

‘라면상무’, ‘빵회장’, ‘욕설우유’ 등의 각종의 ‘갑’에 대한 ‘을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슈퍼 갑들의 행위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항의가 ‘갑’의 횡포에 참아왔던 다수 ‘을’들의 공감으로 확장되며 폭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갑의 횡포에 생을 마감하는 방식의 개인적 선택에 내몰렸던 ‘을’들의 분노가 집합적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골목상권 진출, 납품단가 후려치기, 밀어내기, 위험한 작업은 하청업체가 담당하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갑 행태’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인간적 모욕 행위에 대한 일탈적 ‘갑 행태’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유교문화와 군사문화 잔재 등의 문화적 해석, 현대인의 사회병리학적 문제 등을 통한 접근 시도, 그리고 사회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벼랑 끝에 몰린 ‘을’들의 처지, SNS 등의 소통 수단의 발전 등 ‘을의 반격’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각종의 토론프로그램과 분석기사 등을 통해 넘쳐나고 있다.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방안 중 2가지 정도가 눈에 띈다.

첫 째는 지난 대통령선거 시기 화두가 됐던 경제민주화를 제도화 시켜 내는 것이다.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행위에 대한 단속과 처벌의 강화, 산업안전보건법 등의 개정을 통한 원청업체의 책임 강화, 중소기업적합업종 확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통상임금 문제의 ‘노사정위원회 합의 처리’를 약속한 박근혜대통령의 발언이나 ‘경제민주화의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새누리당의 태도변화 등을 고려하면 경제민주화의 법제화·제도화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문화적 접근을 통한 해결책이다.

흔하게 목격하는 힘센 자에게는 아부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권위적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 역시 ‘을’이 될 수 있다는 자각과 갑을간의 전면적 소통의 문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사회적 환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시대, 갑이 될 것을 요구하는 가정과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자신의 생활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이런 기대는 요원할 것이다.

‘가진 자의 양보’가 힘의 균형 속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던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을의 분노’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세력균형의 회복이다. 세력균형 속에서의 대화와 타협이 공정한 ‘갑’, ‘을’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 사업자들이 협회를 결성하고, 레미콘·화물·학습지 교사 등이 노조를 결성하고, 택배기사들과 실업에 내몰린 청년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협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을의 분노’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니 이를 사회적으로 용인하고 북돋아 주는 것이 지금 이 시간에도 갑의 행태질에 침묵하고 있는 수많은 ‘을’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길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한 시기이다.

<김태근 울산시민연대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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