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교향곡
전원 교향곡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5.1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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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앞에 섰다. 지난겨울 유난했던 추위에 움츠렸던 심신을 툴툴 털고 동네 외곽으로 나 있는 한적한 산책길을 걸어본다. 평소에 좀체 들을 수 없는 낯선 소리들이 포롱포롱 귓속으로 날아든다. 꾸루루 꾹꾹 끅끅끅끅 지즐지즐지즐지즐... . 어쩌면 갓 태어난 아기 새의 칭얼거림 같기도 하고 어미 새가 아기 새를 품고 나지막이 불러주는 자장가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하는 각종 애벌레들의 배냇짓 같기도 한 띠리릿 띠릿 슬슬슬 사르륵사륵 부시럭부시럭 시릿시릿 하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청신경을 자극한다. 여느 때 들을 수 없는 오묘한 소리들에 자신도 모르게 쫑긋 귀를 세운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독 크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딱따그르르 딱딱딱… 둥치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가 메아리로 퍼진다. 위를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를 쪼고 있는 딱따구리의 뽀족한 부리 옆선이 무척이나 섹시하다. 이런 광경을 직접 본다는 일이 신기하기만 하다. 인기척에 놀란 꿩이 커다란 소리로 꿩꿩거리며 푸드득 날아오를 때면 사람이 더 소스라친다.

밭에서 먹이를 찾던 백로들이 발소리에 놀라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은 선경이 따로 없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도 않건만 쪼로롱쪼로롱… 청아한 소리를 내는 새 울음소리가 쳐져 있던 세포들을 올올이 일깨운다. 그런가하면 짹짹짹짹…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무더기로 옮겨 다니는 참새들의 날갯짓은 전형적인 농촌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물을 잡아 놓은 논에서 꾸왕꾸왕 울어대는 우렁찬 황소개구리 울음마저 푸른 계절의 전령사인 듯 반갑기만 하다. 한 번도 구분 할 줄 몰랐던 두꺼비 울음도 이제는 어렴풋이 구별이 된다. 가지에 매달려 내려오고 있던 자 벌레가 바로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살랑 지나가던 바람이 가만히 그를 땅 위로 데려다 준다. 아마 그 자 벌레도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소리로 울고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모든 생명들에게 비명이든 웃음이든 어찌 소리 한 번이 없을 수 있겠는가. 들리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마음깊이 파고든다.

왕창왕창 한꺼번에 망울을 터뜨리는 매화, 진달래, 개나리, 도화, 배꽃, 이팝꽃 등등… 떼 지어 피어나는 꽃들의 함성이, 날마다 터뜨려대는 그들의 환호가,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어떤 소리든 한꺼번에 내는 소리는 견디기 힘든 소음이 될 것이 틀림없겠기에.

다른 입장을 배려하는 식물들의 마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지를 초월한 정신의 소유자들임에 분명하다. 아름다운 꽃을 피워도 우쭐하지 않고 달콤한 열매를 매달아도 내로라하지 않는 그들이기에 그저 바라만 봐도 흐뭇해지는 이유일 것 같다. 울긋불긋 꽃은 꽃대로 파릇파릇 잎은 잎대로 산야를 물들이는 식물의 노랫소리는 다만 안으로 넘치겠지만, 내 귀에는 그들의 고고성마저 아릿아릿 들리는 것만 같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간다. 솔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가슴 밑바닥까지 깨끗하게 청소를 해 준다. 바람은 댓잎에 몸을 부비더니 다시 억새를 쓰다듬는다. 허리를 낮춘 바람이 땅에 붙은 냉이 꽃대를 어루만지다가 여린 별꽃을 쓸어안는다. 지나치는 자리마다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는 바람의 손길에 한결 성숙해진 생명들이 오래오래 손을 흔든다. 근처에서 졸졸졸 흐르는 도랑물 소리에 귀가 번쩍 한다. 언제 이곳에 물이 있었던가. 작은 개울을 이루며 흘러가는 물소리는 찰랑 찰랑 마음 밑바닥까지 맑은 우물을 고이게 한다. 지난 며칠 봄비가 오시더니 그사이 이렇게 아름다운 음향을 만들어 내고 있다. 끊임없이 흙바닥을 기면서도 물은 어쩜 저리도 맑고 투명한지. 햇빛을 반사하며 흐르던 물이 다시금 조금 큰 웅덩이를 만들어 내는가 싶더니 휘어지는 길에서는 제법 큰물인 듯 굽이친다.

흐르는 물소리에 생기를 찾은 풀잎들이 더욱 싱싱하게 키를 늘이고 덩치에 어울리는 꽃들을 열심히 피워 올리고 있다. 잎사귀들이 푸른 입을 모아 고맙다고맙다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멈칫거리던 물길이 슬그머니 방향을 틀더니 잘 썰어놓은 논바닥으로 스민다. 충분히 논을 채운 물이 그 옆의 논에도 아래 논에도 흘러들고 주름 잡힌 논들이 구겼던 허리를 쭉 편다. 그 속으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잠겨들고 때를 기다렸다는 듯 소금쟁이가 미끄럼을 타기 시작한다.

자연의 소리들은 엄마의 약손처럼 우리의 마음을 쓰다듬어 날선 신경을 어루만져 준다. 굳었던 이마가 펴지고.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천연의 소리. 무방비 상태로 온 마음을 부려놓을 수 있고, 아무 생각이 없어도 마냥 편안할 수 있는 소리들은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선물일 것이다. 푸르른 하늘에 한가로이 떠 있는 구름과 자연이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에 한껏 귀를 여는 시간. 이 아름다운 계절이 좀 더 오래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전수안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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