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과 B
乙과 B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5.0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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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제가 된 자사 물품을 불법 강매한 의혹을 받고 있는 모기업의 사례를 통해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유통업계의 불편한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해당기업은 9일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영업현장의 밀어내기(부당 강매행위) 등 잘못된 관행이 벌어진 사실을 인정했다. 아울러 잘못된 행위 개선책과 상생 방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약속이 얼마나 잘 이행되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이 회사뿐만 아니라 상당수 기업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약자인 대리점의 희생이 계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건을 두고 언론에서 대리점주를 ‘을(乙)’이라 칭하며 억울한 사연들을 알리고 있다.

갑(甲)과 을(乙)은 원래 계약 편의상의 대리명(代理名)일 뿐이다. 주종(主從)이나 우열(優劣), 높낮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나열이다. 계약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 행하고, 위반하면 책임을 지면된다.

그러나 권력과 계급, 돈을 가진 ‘갑’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도를 넘은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을'이 서럽고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을'로 살수록 내 자식만은 '갑'으로 살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한다. 이처럼 ‘을’을 서럽게 만드는 것은 가진자의 횡포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 특히 대중예술에는 ‘을’이 대접받는 사례가 허다하다.

‘을’은 소위 말하는 ‘B급 문화’다. 진지함보다 가벼움, 메시지보다 재미, 주류보다 비주류를 지향하는 문화, 소수보다는 다수를 지향하는 문화다. 대한민국은 지금 ‘B급 문화’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시작으로 ‘젠틀맨’까지 국내를 넘어 세계를 휩쓸고 있다.

왜 대중들은 ‘B급 문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사실 ‘B급 문화’에 대한 명쾌한 학술적 정의는 없다. 원래 ‘B급’이란 말은 영화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대형작품에 보너스로 상영해주는 소위 끼워주기 아니면 원플러스원의 행태로 동시상영해주는 영화를 두고 한 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최근엔 방송을 비롯한 대중문화 전반으로 그 의미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고상하고 엄격한 주류문화와는 대비되는 거칠고 싸구려스럽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B급 문화’가 고전적인 전문가들이 평하는 것처럼 천박하고 저질은 아니다.

기존의 질서나 틀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파격적인 것을 추구한다. 일종의 저항, 반발 심리도 작용한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보면 다양성, 창조성 등의 공간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억압된 내면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주고 잠깐이라도 마음껏 환호하고 즐기면서 팍팍하고 지친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고 사회에 대한 불만, 냉소 같은 것들을 날릴 수 있다는 점이 통한다.

‘B급’이라는 것이 ‘A급’보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류의 방식이 아닌 비주류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문화에서는 ‘B급’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데 반해 경제 논리에서는 ‘을’이 왜 힘들고 멸시당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문화는 가진자들이나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중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나눠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종속된 권리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을’이라는 존재는 경제적 논리로 형성된 관계이기 때문에 우월적 지위를 가진 ‘갑’과 종속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이다.

유통업계에서 승자독식주의가 활개를 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에서 더 이상 ‘갑’의 횡포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을’이 없으면 ‘갑’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상하 관계가 아닌 수평적 동반자 관계로 정립해 더 이상 ‘을’이 억울하거나 불편해 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대중문화가 ‘A급’과 ‘B급’이 공존하듯이 경제사회에서도 ‘갑’과 ‘을’은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공존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이주복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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