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선생님과의 인연
K선생님과의 인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5.0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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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재경 학성고 동기 모임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날 참석한 어느 동기생이 옛 은사이신 K선생님의 근황을 전해 준 것이다. 국어 교사이자 담임을 맡으셨던 그분은 내가 고교 2학년 때인 1974년 봄, 갑자기 서울 중대 부고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 그 뒤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두절된 선생님의 소식은 더 이상 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울에 거주하시는 K선생님의 연락처를 알게 된 것이다.

미래를 향한 푸른 꿈에 한창 부풀었던 학창 시절, 제자들이 나아가는 길에 환한 불을 밝혀 주신 모든 선생님들의 은혜에 늘 감사한 마음이지만 이른바 ‘문학도’를 자칭하던 나와 K선생님과의 추억은 좀 특별했었다.

동기 모임에 참석하고 며칠이 지난 뒤 나는 K선생님과 대학로에 있는 한 카페에서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다. 30여 년의 짙은 그리움과 두터운 침묵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대화의 첫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순 없지만 선생님과 나는 숨 돌릴 틈 없이 밀린 추억담을 신나게 풀어 나갔다. 거침없는 세월 앞에, 영원한 문학청년을 고수하시던 선생님은 어느덧 고희(古稀)에 접어드셨고, 까까머리 제자는 초로(初老)의 신사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K선생님과의 대화가 뜨겁게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나의 뒤통수를 꽝 치는 듯한 말씀에 화들짝 놀란 나는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 다시 써라. 구차한 변명 대지 말고 무조건 등단할 준비해!"

1980년 초 출판계에 첫발을 내디딘 뒤 수십 년 세월 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문학’이란 단어와는 멀어졌던 터라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출판사 업무라는 것이 주로 외국서적의 번역 내지는 국내 저자들과의 계약에 따라 그들의 저서를 출간해 주는 일이 다반사였으므로 내 개인적인 창작의 길과 병행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었다. ‘문학’이라는 두 글자만 봐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글 쓰는 일 외에는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갖지 못하였던 학창 생활은 이미 먼 옛날의 추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대학시절 주어졌던 비중 있는 문학상 하나가 오히려 커다란 벽으로 다가와 결국 그 벽을 뛰어넘지 못했던 아픈 기억을 지우느라 무척 애를 먹었던 터였다. 그러나 만남 뒤부터 이어진 선생님과의 처절한(?) 줄다리기는 끝 모르게 이어졌다. 이미 녹슨 제자의 소질을 어떻게 해서든 다시 갈고 닦도록 유도해 보려는 스승의 깊은 사랑과, 빛바랜 현실을 핑계 삼아 적당히 피해 보려는 제자의 나약함이 서로 겉돌기 시작했다.

몇 달째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문학을 향한 길이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인지 이미 알고 있는 나로서는 선생님의 뜻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답을 구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어느 날,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선생님의 위치에서 나를 바라본 뒤 불현듯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마침내 나는 선생님의 큰 뜻에 따르기로 마음을 굳힌 뒤 오랜 세월 녹슬어 있던 문학적 감성에 기름을 조금씩 칠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굳어 버린 감성은 그리 쉽게 반응하지 않았다. ‘쓰고, 지우고, 찢고’를 되풀이하며 어느 날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 포기의 수순을 밟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과의 약속을 더 이상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무겁게 닫혔던 거대한 문이 조금씩 조금씩 그 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진감래라 하였던가. 2009년 봄, 마침내 나는 모 문학지의 ‘신인상’으로 늦깎이 등단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나의 관절은 차츰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간 입은 선생님의 은혜에 대한 미미한 보답이라도 하듯 지난해에는 제3회 백교문학상을 수상하는 뿌듯함도 누렸다.

하마터면 현실에 안주, 그럭저럭 세월만 흘려보내고 나이테만 늘려갈 나의 인생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미 꺼진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의 불씨를 되살려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해 주신 K선생님. 그분께서 이 화창한 봄날 S대학병원 격리병동의 침상에서 병마와 싸우고 계신다.

참 스승의 의미를 되새기는 5월. 깊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K선생님의 빠른 쾌유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김부조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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