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궁지조(驚弓之鳥)
경궁지조(驚弓之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4.3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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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화살을 맞은 경험이 있는 새는 구부러진 나무나 활을 보고 놀란다는 뜻. 어떤 일로 한 번 혼이 난 뒤에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을 가짐을 이르는 말. 상궁지조(傷弓之鳥)와 같은 말.

벽초(碧初) 홍명희 선생(1888~1968)의 ‘임꺽정’ (사계절출판사, 2009) 3권 ‘양반편’ 82페이지 에 경궁지조(驚弓之鳥)라는 표현이 나온다.

…… “인심 소란하기는 시골 서울 일반이니 서울서 그대로 지냅시다” 하고 낙향하지 말자고 하였으나 “일반이면 시골로 가자. 우리는 경궁지조(驚弓之鳥)가 되어서 서울서는 제일로 옥사에 맘이 송구하다” 하는 형의 말을 억지로 우기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서울 떠나는 것을 좋게 여기는 노인 어머니의 의향을……

대하역사소설인 ‘임꺽정’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부터 약 10년간 조선일보에 장기 연재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미완의 작품’이다. 사람대접 못 받는 막노동 이상을 해야 하는 백정 출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역사 속에서 민촌 군상(群像)의 신산스러운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한 의적소설의 일종이다.

‘임꺽정’은 사실에 중심을 둔 역사책이 아니라 검객 임꺽정, 명궁 이봉학, 박유복, 길막봉 등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창조하면서 군도(群盜)를 내세운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책이다. 소설은 도적들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강자나 승자의 시각이 아닌 약자나 패자(敗者)의 입장에서 폭넓게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양반 중심의 봉건사회에서 핍박받고,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고, 주먹으로 대표되는 몸 하나 밖에 없어 처절한 등장인물들의 정치적·사회경제적 조건과 현실의 모순을 부각시켜 식민지 백성의 몸부림과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임꺽정과 관련, 명종실록 사관(史官)의 추상같은 필법은 참으로 음미할 만하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책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삼엄한 논설이다.

왕조나 궁정정치 중심의 역사소설이 아니라, 붓대와 먹물들이 설치는 세상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를 풍찬노숙· 유리표박하는 민중으로, 역사를 민초의 고단하고 가난한 삶을 통해 이해하는 그는 영웅사관을 배척한다.

결국 도둑이나 화적, 역적이 될 수밖에 없는 궁핍하고 어려운 백성이 중심이 되는 민중사관에 뿌리를 둔 작품을 통해 그는 우리 근대문학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름 없는 상놈의 삶과 썩어서 이름 높은 양반의 세상을 그린 ‘임꺽정’은 훗날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김주영의 ‘객주’, 황석영의 ‘장길산’ 등의 자유와 평등을 꿈꾸고 실천하는 민초를 주인공으로 한 여러 대작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병해대사, 정암 조광조, 남명 조식, 이지함, 이장곤, 이윤경 등의 다채로운 행적과 윤원형, 남곤, 심정, 보우 등 양반들의 해악과 위선은 소설의 뜻과 깊이, 품격과 수준을 더한다. 특히 소설이 조선시대 중기의 민초들의 생활상과 풍속 등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아름다운 우리말을 다시 찾아내고 사라져가는 토속적인 어휘들을 발굴해 낸 것은 참으로 눈부신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어문학사(語文學史), 지성사(知性史)의 빛나는 승리로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홍벽초 선생은 춘원(春園) 이광수, 육당(六堂) 최남선 선생과 함께 1920~30년대 ‘조선의 삼재(三才)’로 일컬어진 작가이자 정치인이다. 이들은 나라 잃은 불행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감당키 힘든 영욕의 파고를 헤쳐 나갔다.

충북 괴산 출신으로 아버지 홍범식은 경술국치 당시 자결한 순국열사. 장남 홍기문은 북한의 저명한 국어학자이며 손자 홍석중은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황진이’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벽초는 작가,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이었다. 북한 내각부수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도 역임했다.

‘임꺽정’은 방학기, 이두호, 고우영 화백의 만화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지난 97년 SBS에서 드라마(PD 김환영, 정흥채 주연)가 만들어졌다. 좌절한 혁명가 대접을 받는 임꺽정은 북한에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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