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2)
제6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2)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0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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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촌놈이 서울 유학은 일대 사건

시험 결과를 하루가 천일처럼 기다리며

지금의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는 1969년부터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연합고사라는 이름으로 일정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그 성적으로 자기가 지원하는 학교로 가던 때가 있었다. 이보다 앞서 전국적으로 국가고시를 치고 그 성적으로 전국 어느 학교나 지원할 수 있는 시기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옛날에는 전국에서의 일류중학교가 존재할 수 있었다. 연합고사이건 전국 국가고시이건 입학시험 경쟁으로 인한 세칭 일류중학교는 있게 마련이다. 물론 지금의 구미 각국에서 유명하다는 사립대학의 성격과는 크게 차이가 있지만 동강 선생이 중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유명한 학교가 있었다. 동강 선생의 구술(口述)을 옮겨본다.

‘식민지의 억압된 분위기(1930~40년대) 속에서도 소년은 미래를 꿈꿨다. 답답한 시골을 탈출해서 큰 바다로 나가기를 결심한 나는 소학교 선생들과 동기생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공립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지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요즘은 지방 출신이 서울로 유학 가는 일이 흔하지만 내가 진학하던 시절에는 감히 시골 촌놈이 서울로 유학 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더구나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는 공립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였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와 염려 속에 입학시험을 치루고 결과를 기다리며 어찌나 가슴을 졸였는지 하루가 천일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동강 선생이 1939년, 서울의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를 때에는 입학시험이 제2고등보통학교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출제하여 만들어진 시험문제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험을 보았다. 첫째가 서울 아이들 중심의 출제 경향이다. 당시 서울지역 소학교 학생들이 익힌 학습내용을 중심으로 입학시험문제가 출제되는 것이다. 당시에 유명한 소학교가 수송, 덕수, 재동, 효제이었으며 주로 일본 학생들이 많이 다녔다. 둘째가 서울 놈과 촌놈의 차별과 어름장을 받아가며 시험을 치르는 상황이다. 서울 놈들은 촌놈의 복장부터 알아보던 시절이었고, 이것이 압박으로 작용하던 교실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대개 2일 동안 시험을 치렀다. 개중에는 첫날 시험을 보고 안 되겠으면 둘째 날에는 시골로 귀향했다. 동강 선생이 시험을 치루고 가슴 조이며 기다렸으면 꽤 자신 있게 시험을 본 것이었다. 허긴 동강선생의 소학교 졸업장에는 우수상장 하나가 더 있었는데 소학교 6년을 우수한 학생으로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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