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조형유물을 보며 18 신상(神像)조각 ④
신라의 조형유물을 보며 18 신상(神像)조각 ④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0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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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는 신의 종류가 다양했다, 그리고 다신을 구별하는 측면에서도 그 특성을 지닌 신의 모습이 조상되었다. 그 신상들은 풍성을 가져다주는 신의 상이며, 또한 신과 인간의 중간자인 왕권도 상징하는 상(像)으로서, 일상사물은 아니며 상상을 구사한 가시의 모습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구현된 신상을 숭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부터 국가를 이룩한 중동지역은 수많은 민속신앙의 자생지였다, 그런데 중동의 종족 대부분이 함(Ham)족인데 유대종족은 유일한 셈(Sem)족이며, 함족의 여러 나라들과 국경을 접해서 항시 국가안보의 부담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민족존망의 기로선상에서 셈족 여러 부족들의 결합은 필연적이었으며, 그 응집력을 절대적인 존재성에서 구하여야만 했다.

그들의 생사문제를 호소하며 도움을 기원하려는 창조전능의 하나님‘야훼’에 의해서 유대민족이 선민(選民)되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유대신앙으로 무장했다. 따라서 유대민족의 생존의식은 배타성이 될 수밖에 없으며, 민족의 길고 긴 방황으로 더욱 배가된 비타협성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서 구두쇠가 되었고, 나치에 학살을 당했다

독수리 날개와 사자 몸체에 인간 두상을 접합한 수호신 스핑크스처럼 두세 가지 동물의 특정한 부분들을 접합한 함족의 신상은 셈족유대 입장에서 보면 절대 유일신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든 물성우상(偶像)을 인간자신이 숭배하는 어리석음과 그리고 신의 모습은 적어도 인간이나 동물과는 달라야만 하는 신에 관한 유대관념은 우화적(寓話的)인 신상숭배를 당연히 금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배타(排他)로서는 유대민족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깨달은 예수는 사랑으로 반기를 들어서 통칭의 기독교가 생성되었고, 이후 발생의 끔찍한 종교분쟁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6백여 년 후 예수의 후계선지자 마호메트는 유대교의 배타성과 기독교의 예수신성(神性))에 대하여 하나님 ‘알라’의 코란성경으로 이슬람(Islam: 평등평화)이 구축, 확장되는데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신상은 없다

이집트와 동시대의 메소포타미아문명은 이라크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 사이의 평원문명이다, 산(山)이 적어 석재가 희귀해서 흙을 이용한 벽돌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와는 달리 유적이 적다. 다만 신전과 방위사령부 겸용인 지구라트(Ziggurat)가 남아있다. 구약성서의 바벨탑도 이의 일종이다.

이 지역 건축물은 고대부터 첨두 아치스타일이 발달했는데, 석재가 아닌 단위의 벽돌로서 견고하게 축조할 수 있고, 기하 반원의 곡선 조형미가 합쳐지는 양식이다. 내외장식재는 건물의 수명과 조형미를 더할 수 있는 타일이 발달되어서 벽면의 회화나 부조(浮彫)는 규격타일이나 조각타일의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아랍지역권에는 복잡 다양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있어서, 이슬람 성당은 조형미의 코란 구절과 아라베스크 문양의 모자이크장식이다. 아라비아 천일야화에 걸핏하면 등장하는 보석궁전은 보석들로 장식한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외장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려 보이므로 이의 비유이다. 방콕 대부분의 원추형 금박외장 탑과는 유일하게 다른 새벽사원의 가장 높은 자기모자이크 탑도 관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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