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3.1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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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퇴임한 김능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행보가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대법관을 지내기도 한 그가 퇴임한 바로 다음 날부터 부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으로 출근했기 때문이다. 등산 점퍼와 펑퍼짐한 바지에 목도리를 두른 채 TV 뉴스 화면에 비친 그가 손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슈퍼 아저씨’였다.

법관으로서도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관 변호사들이 ‘대형 로펌에서 얼마를 받았네’ 말들이 많지만 그는 자유롭기만 했다. 새 정부 입각 후보자들의 과도한 전관예우로 비판 여론이 거센 요즘의 상황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런 아름다운 ‘전관’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한 편으론 가슴 뭉클하다.

2006년 대법관 인사청문회 때도 그는 “퇴임 뒤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동네에 책방 하나 내고서 이웃 사람들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며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법관 퇴임 뒤에도 대형 로펌의 유혹을 뿌리치며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낼 계획이 없다고 밝혀 그의 청빈함은 더욱 주목받기도 했다.

또 최근 국무총리 후보로도 거론됐지만, 대법관 출신이 행정부에 몸담는 건 적절치 않다며 공개적으로 거절했다고 한다. 고위 공직자의 ‘아름다운 처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아직 그의 꿈인 책방을 내진 못했지만 부인과 함께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사회지도층이란 이름 그대로 국민들의 본보기가 돼야 할 사람들이다. 그만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국민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 만큼 시류에 영합하기보다는 시작부터 끝까지 올곧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참모습이다. 그러나 솔선수범하는 모습은커녕 수시로 눈살을 찌푸리게 일부 지도층의 ‘반칙과 특권’에 국민들은 절망해 온 지 이미 오래다.

김능환 전 대법관의 보도를 접하면서 새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프랑스 격언으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은 사회지도층, 다시 말해 ‘권력자’는 물론 부(富)를 많이 축적한, 즉 가진 자에게도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를 아우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회 환원 즉, 나눔이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최부잣집’을 꼽는다. ‘부자의 귀감’이 된 경주 최부잣집은 400여 년 동안 12대에 걸쳐 나눔을 실천했다.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이웃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식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경주 최부잣집 명성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조상이 일궈놓은 부를 후손들이 흥청망청 쓰다가 손자 대에 가면 결국 망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옛날 경주 최부잣집은 달랐다. 이들은 보란 듯이 12대에 걸쳐 400여 년간 부를 유지했다. 자신의 잇속만 채우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부자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고, 곡식을 풀어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고,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간은 무명옷을 입어야 하며, 찾아오는 과객에게는 후하게 대접하라. 진사(進士) 이상의 벼슬은 금하고 부(富)와 명예(貴)를 동시에 소유하지 말라.’

이러한 최부잣집 6훈(訓)은 12대를 이어온 ‘부자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요즈음 다시 한 번 되새겨볼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경주 최부자는 소통 부재의 시대, 양극화가 심해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자유경제 체제 아래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쌓은 사람에게 누가 돌팔매질을 할 수 있을까마는 아직도 일부 기업가나 고소득자들의 탈세 행각 또는 재산은닉 행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땅에서 모든 부자가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도사리고 있는 실정이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사회 지도층과 가진 자의 도의적 의무가 진정 무엇인지를 새삼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김부조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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