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1)
제5화 보통학교, 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1)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6.0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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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강 선생의 초등학교 시절.
7세 때 초등학교 입학 “당시 드문 일”

어머니가 책 읽어주며 ‘조기교육’

병치레 잦아 운동보다 감수성 키워

우리나라 학교 이름이 제도는 바뀌지 않고, 학교급별 이름은 이렇게 크게 바뀌었다. 동강선생이 1933년 울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그 시절에는 국민 의무교육 개념이 없고 단지 신교육(新敎育)이었을 때, 7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한 반에 열 대 엿 살 먹은, 장가든 학생이 7세 어린이와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 중반까지도 시골에서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장가보내어 농사 인력을 보충하던 농업국가이었다. 시골에서 당시 울산읍의 인구가 통틀어 3만이 채 안 되던 때에, 신식교육을 받으러 학교라는 큰 건물에 갔다는 것은 어린 동강의 눈으로도 신기한 것이었다. 부모가 학교까지 따라 가서 챙기지 않으면 교실도 잊어버릴 만큼 학교와 집의 차이는 컸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학교의 화장실과 가정집의 화장실이었다. 일본식의 신식 화장실은 비록 바닥이 보일지라도 네모난, 쪼그리고 앉을 자리가 있었고, 우선 문이 달린 폐쇄된 공간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경성(서울)같은 대도시에서도 화장실은 집 앞 텃밭의 외진 곳에 허름하게 지어 놓은 헛간의 귀퉁이에 커다란 장독 묻어 놓고 그 위에 널빤지 두 쪽을 걸쳐놓은 상태이었다.

동강 선생은 6남매, 위로 누이 하나와 거의 연년생의 터울로 5형제의 장손으로 태어나 증조(曾祖) 할머니의 품속에서 자랐다. 물론 집안의 다른 어른들의 사랑과 보살핌도 지극했다. 남아선호 사상에 장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고 나기를 허약해서 이런 저런 병치레를 많이 하였다. 음식도 어머니가 해주는 것 아니고는 입맛에 맞지 않아 잘 먹지 않는 편이었고, 어른들 틈에서 생활하다보니 또래의 아이들과 장난치고 뛰어다닐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운동부족의 면역력이 떨어지는 허약체질이 되었다.

신체적 조건은 이렇지만 지적발달은 조기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어머니가 학자 집안의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언문(諺文, 한글)을 깨우친 몇 안 되는 여성이었다. 이런 어머니로부터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깨우치고 어머니가 가끔 책을 읽어주셨으니 조기교육의 모델이었다. 이 장면은 바로 가정에서 자녀의 정서적 발달을 위한 튼튼한 기초공사와 같다. 이 경험이 훗날 중학생 시절, 감수성 많은 문학 지망생으로 세계명작 읽기에 빠져 선생님으로부터 정학(停學)을 받는 벌을 받기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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