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도시 변천사 기자의 눈으로 꼼꼼히 관찰
공업도시 변천사 기자의 눈으로 꼼꼼히 관찰
  • 양희은 기자
  • 승인 2012.12.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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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응 前 부산일보 기자 <끝>
부산일보 울산 주재기자로 근무했던 이철응(86)씨.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타관에서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유입해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시가지에 몇 안 되던 다방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곳곳에는 유흥주점이 생겨났고 소규모의 백화점도 들어섰다. 애초 반농반어의 작은 읍마을이었던 울산은 그렇게 도시로 성장해갔다. 1962년 2월, 울산공업센터 지정 이후 도시는 급격하게 변했다.

공장부지 조성이 이뤄지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중장비가 들어왔고, 그 기계들이 산을 깎아내고 메우며 일을 시작하자 지도상에 그려졌던 공업단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도시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 반농반어 울산, 도시로 비약적 변화

1951년 7월부터 부산일보 울산 주재기자로 근무했던 이철응(86)씨는 울산의 공업화와 함께 시작된 사회의 변화상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이씨는 울산이 도약하던 초창기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태화강의 금모래변과 그 강에서 은어잡이를 하던 울산사람들의 모습들. 조용하던 도시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고 거기에 맞춰 기지개를 켜던 울산의 모습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이씨는 “도시가 발전하면서 뒤따르는 사회적인 문제들도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을 하려 모여든 사람들로 집은 모자랐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성남시장 일대 비가림 천막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다. 거지를 찾아 볼 수 없었던 울산에 공업센터 지정 이후 4~5년 동안 거지들도 많아졌다. 돈이 돌자 생겨난 문제였다.

인구증가에 따른 주거지역 개발이 시작됐고, 인근에 땅을 가진 사람들은 그 보상비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기도 했다. 전세나 월세 개념의 집이 생겼고, 논과 밭, 저수지 등이 없어지고 그 곳에는 하나, 둘 집들이 들어섰다. 단독주택 뿐 아니라 이전에 없었던 아파트들도 생겨났다. 특별건설국은 공단 부지조성과 함께 항만, 댐 등의 기반시설과 주거지, 편의시설 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면서 공단 지역 뿐 아니라 외곽의 농촌 경기도 좋아졌다. 부식용으로 수요가 늘어난 고추, 배추, 무 등이 많이 팔리게 되면서 판로가 확보됐기 때문이다.

지역의 젊은이 대부분은 유공, 한국비료, 동양나일론, 영남화학 등 공단의 노동자가 됐다. 울산농업고등학교는 울산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1962년부터 3~4년 사이 인구는 2배 이상 늘어났다. 공단 일을 하러 몰려오는 사람 외에도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려는 타지 사람들도 다수였다. 경험이 있는 장사치들은 술집과 다방 등을 곳곳에 개업했고 60년대 초반까지 장급의 술집이 3곳뿐이었던 울산에 다양한 유흥업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했을 상점들도 나타났다. 작업복·작업화 전문점을 비롯해 양복점, 대중목욕탕 등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시가지에는 백화점이란 간판이 붙은 상점이 3개나 생겨났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작은 슈퍼마켓에 불과한 곳이었지만 의류, 생필품 등을 인근의 부산이나 대구에서 상인들이 떼 온 상품들을 팔았다.

“당시 술집이나 다방에서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대우를 받았지요.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인기가 없었어요. 일부러 작업복을 입기도 했다니까요.”

노동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그들이 사회 전반을 움직이는 계층이 됐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1년에 2~3개의 공장들이 들어섰고, 60년대 후반에는 석유화학단지가 본격적으로 조성돼 1972년 가동됐고, 울산은 차츰 공업도시로의 완연한 면모를 갖춰갔다.

▲ 1970년대 공업탑 주변을 돌며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 한복 차림의 여고생들.

● 인구·공장 2배 증가… 노동조합 등 신설

석유화학단지가 본격 가동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해문제도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공해라는 단어를 몰랐다. 울산상공회의소에서는 공해방지대책위원회도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환경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달동이나 삼산들 일대의 농작물이 잘 되지 않고, 소들도 풀을 먹지 않는다고 농민들이 울산시에 건의하기도 했다.

공장이 늘어나면서 서울이나 타지에서 온 기술자들도 많아졌다. 노동법을 아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노동조합도 생겨났다. 지금처럼 파업을 하거나 큰 쟁의를 벌인 것인 아니었다.

그는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내면서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의 일화도 하나 꺼냈다. 직접 봤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조선소가 처음 문을 열고 정 회장과 노동자들 사이에 약간의 마찰이 있었는데 근무조건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노동자 중 누군가가 정 회장에게 돌멩이를 던졌는데 얼굴에 맞아 상처가 나서 피가 흘렀는데도 끄덕하지 않고 태연하게 현장에서 말을 이어가더라는 겁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 회장의 저런 배짱 때문에 현대가가 성공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합니다.”

● 언론인으로서 성장 현장 구석구석 누벼

이씨는 언론에 종사하면서 울산의 변화상에 대한 뉴스를 끊임없이 생산했다. 공단의 굵직굵직한 사건에서부터 울산사람들이 바뀌어가는 사회상에 적응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현장을 누볐다. 누구나 이씨가 쓴 기사를 읽으면 공업도시 울산의 변화상을 환하게 알 수 있었다.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이씨는 인터뷰를 위해 미리 여러 가지 내용들을 작은 종이에 메모해 들고 나왔다. 당시를 떠올리며 장소나 수치 등을 기억해 내 꼼꼼하게 정리한 종이를 탁자 위에 놓았다. 인터뷰 내내 그것들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당시의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의 사회 변화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씨는 “공업센터 지정과 함께 도시계획을 수립할 때 인구 50만을 기준으로 도시를 정비했다. 그런데 지금 인구 100만이 넘는 거대도시가 됐고, 처음 도시계획과는 많은 차이가 나서 도로망이나 주거 역시 아쉬운 점이 많다”며 “이제는 또 다른 도시를 꿈꾸며 도시계획을 해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양희은 기자 yang@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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