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후 실패 거듭했지만 바다에서 다시 일어서
이주 후 실패 거듭했지만 바다에서 다시 일어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2.1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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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춘 現 광성호 선주
▲ 임성춘 現 광성호 선.

“어릴때부터 공부보다는 배에서 노는 것이 좋았습니다. 일곱 살 때 노 젓는 방법을 배웠고,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탔습니다. 나는 타고난 뱃사람입니다.”

울주군 온산면 목도마을이 고향인 임성춘(52)씨는 자신을 ‘타고난 뱃사람’이라 소개했다. 코흘리개를 막 벗어날 무렵부터 배 위에서 살았으니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표현한 셈이다.

●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본격 고기잡이

그의 아버지도 목도에서 뱃일을 했다. 작은 똑딱선으로 목도 근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가족의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물질이 풍족한 살림살이를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잡아온 문어와 낙지는 어머니가 시내 중앙시장으로 내다 팔았다. 하루 두세번 왕복하는 버스를 타고 시장에 다녀오는 어머니를 지금도 기억한다. 어머니가 앉아서 고기를 팔던 좌판은 없어졌지만 그 자리는 남아 있다. 임씨는 장성한 자녀들과 가끔씩 중앙시장에 나가 “여기가 너희 할머니가 고기를 팔던 자리다. 할머니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아버지도 없고 너희들도 없다. 잘 기억해 둬야 한다”고 교육한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기성회비를 못 낼 정도의 가난에 힘들어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가 다른 집 자식들처럼 회사원이 되기를 원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배운 뱃일과 바다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2남 1녀 중 장남인 임씨는 어린 시절부터 당연히 아버지 일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돌려놓기 어려웠던 부모는 결국 가업을 물리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할 일은 이것 밖에 없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본격적인 뱃일을 시작했다. 탁월한 기량이었다. 힘이 세고 몸이 날랬다. 동네에서는 대번에 ‘뱃일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자자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10대 후반이던 1976년 온산면 16개 마을의 이주 결정이 내려졌다. 온산 석유화학단지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은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로 이주했다. 그동안 생계를 이어주던 배를 팔고 이주 보상비로 받은 돈으로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상비와 배를 판 돈은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가난한 어부들은 이주비로 받은 현금이 금덩어리 같았습니다. 푼돈만 만지다가 많지는 않지만 목돈을 만지고 보니 엉뚱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갑자기 생긴 돈은 이주민들에게 허영심을 가져다 줬고, 곶감 빼먹듯 한 푼 두 푼 이주 보상금을 쓰면서 안일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뱃일만 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마땅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에까지 빠진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다른 이주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회에서 마땅하게 할 일이 없던 그는 보상비를 축내가면서 이곳 저곳 기웃거렸다. 배운 것은 뱃일뿐인 그는 결국 막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에도 나가봤고 에스오일이나 SK에너지 등에서 현장일을 했다. 바다에 익숙하던 그에게 육지는 어색했다. ‘노는 물이 달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고 막노동이 넉넉한 생계를 보장해 주지도 않았다. 7~8년을 그렇게 허송했다.

▲ 2010년 8월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화산근린공원에 온산이주민 망향비가 준공됐다.

● 도시생활 방황하다 결국 바다로

▲ 울산 앞바다에서 고기잡이 중인 어선.

우울한 심정으로 달포 바닷가에서 어업을 생업으로 이어가는 후배를 찾아갔다. 한없이 넓던 어장이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었지만 어업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후배였다. 후배가 잡아 올린 싱싱한 횟감으로 소주를 마시면서 후배가 말했다.

“형님. 작은 배라도 사서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하세요. 형님은 우리들 중에 최고의 어부 아닙니까? 공사판으로 도는 것보다 바다에서 인생의 승부를 거는 것이 형님답습니다. 타고난 기술을 가진 어부가 육지에서 뭐합니까?”

후배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생활에 대한 불만족도 있었지만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물일을 하자. 다시 바다로 가자. 배운 것은 이것 하나 밖에 없는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놀랍게도 그의 아내 또한 흔쾌히 동의했다. 1990년대 후반 5t급 배를 샀다. 그 돈은 동생이 빌려줬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 오징어가 풍년이었고 겨우내 열심히 오징어를 잡아 동생에게 빌린 돈을 깨끗하게 갚았다.

오징어잡이에서 당시 유행이던 문어 통발 등으로 계속 어업을 이어갔다. 문어잡이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더 큰 배를 사기로 하고 4억 이상의 빚을 내 29t 배를 완도에서 건조해 가져왔다.

그러나 너무 큰 욕심을 냈던지 거액의 빚이 그를 짓눌렀다. 배 뿐만 아니라 어구들도 모두 빚으로 마련했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하는 문어잡이가 본궤도에 오르지 않자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빚을 탕감할 능력이 없을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야반도주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내에게 조용하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다. 어업을 다시 시작할 때도 용기를 줬던 아내는 이번에도 큰 힘이 됐다. 아내는 “도망갈 용기가 있다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갚자”고 그를 다독였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이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1년 가량 고생을 하던 중 2006년 겨울 문어가 많이 잡히기 시작했고, 그 후 3년 정도 문어는 대풍이었다. 초기 1년 동안 번 돈으로 그는 모든 빚을 정리했다. 고진감래의 결과였다. 그러나 계속 잘 잡힐 줄 알았던 문어는 다시 잡히지 않았고, 29t 광성호의 주인은 바뀌었다. 배를 판 돈으로 다시 2년 정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돈도 조금씩 줄어 들었다. 마치 이주 보상비를 빼먹던 그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 공업도시 발전만큼 시민 삶도 성장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강양항으로 갔다. 작은 배를 사서 고동잡이 일을 시작했고, 광성 1호와 2호는 오늘도 바다에서 고동잡이가 한창이다. 문어잡이 때처럼 큰돈을 만지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일하면 노력의 대가만큼 벌이가 됐다. 바다나 땅이나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공단이 생기고 이주를 하면서 정부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다는 그다. 당시에는 돈도 얼마 주지 않으면서 집과 땅을 국가에서 뺏듯이 가져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에 와서 보면 내가 목도에 계속 살았다면 이런 세월을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이주하지 않고 목도에서 계속 살았다면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 집에서 구식 화장실을 이용하며 불편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단이 생기면서 시골 어촌 어민들의 삶도 향상됐지요. 울산이 공업도시로 성장한 것은 울산시민의 생활도 크게 성장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16개 이주 부락 중 달포, 목도, 당월, 우봉, 이진 5개 부락 사람들이 어업을 주로 했다. 다수의 사람들은 전업을 했고, 당시 큰 배를 갖고 있던 선배들도 지금은 공공근로 등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육지일도 바닷일도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다고 임씨는 전했다.

강양 앞바다에 매일 새벽 나가 일을 하는 임씨는 “이 바다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따뜻하게 살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항상 바다가 고맙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양희은 기자 yang@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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