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산업발전 희생의 씨앗 된 것 보람느껴
지역 산업발전 희생의 씨앗 된 것 보람느껴
  • 이상문 기자
  • 승인 2012.12.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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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국 울산 남구문화원 부원장
● 고향 지척에 둔 산업화 실향민

장정국(65)씨는 용연동 871번지에서 태어났다. 100여년 동안 3대에 걸쳐 살아왔던 고향이다.

장씨는 고향집을 떠난지 35년이 됐다. SK에너지의 원유저장시설에 집터를 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루도 고향마을을 잊어본 적이 없다. 고향집의 삼면은 대숲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감나무가 6그루 있었고 맑은 샘도 있었다. 앞마당에서 석류가 익어갈 무렵이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용연동은 천혜의 낙원과도 같았다. 동으로는 신라시대 교역의 중심항이었던 염포와 서로는 처용설화의 근원지인 개운포, 남으로는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다. 또한 동쪽 인접한 곳에 봉화산, 서쪽에 가리소류지가 있다. 그런 장씨의 고향마을이 공단 조성으로 모두 이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었다. 모두 집을 비우고 시내로 뿔뿔이 떠났다. 용연동은 도로 제일 위쪽 뻔덕마을(송계부락), 새각단(신리), 도로 밑의 용신(용시내)마을로 이뤄져 있었다. 도로변 장터에서는 5일장이 서기도 했다.

1954년 5일장 개장을 기념해 전국장사씨름대회가 열렸는데 울산의 변두리 이 작은 촌락에서 전국에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출전하는 씨름대회가 열린 것은 이 동네에 김영태라는 국내에서 이름난 장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합도중 김영태 장사의 팬티가 찢어져 중요한 부분이 노출되는 바람에 구경꾼들이 자지러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 연극·전국씨름 대회 등 추억 가득

1960년 전후 장터에서는 정월대보름날 동네청년들이 연극을 공연했었다. 한때 서울에서 악극단원으로 활동했던 한태순씨의 감독으로 연출된 ‘가거라 삼팔선’, ‘화랑도’ 등의 작품은 가히 수준급이었다고 평가된다.

장씨는 몇 해 전 장생포 고래축제 때 이 고장 출신인 김삼일 교수의 연출로 공연된 동제의 신파극 ‘가거라 삼팔선’을 관람했는데, 시종 옛 생각에 잠겼었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고 고백했다.

그가 살었던 뻔덕마을에서도 설 뒷날에 연극과 노래자랑의 행사가 수년간 이어졌다. 주로 초중학생들이 출연했고 마을에서 제일 큰집(일병 대문집)마당에 가설무대가 설치돼 행해졌는데 이 행사를 위해 한 달의 연습과정을 거쳐야 했다.

같이 연습을 한 친구의 이야기는 지금도 장씨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 해도 두 편의 연극공연을 위해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연습장소는 삼간초가집인 장씨의 집 작은 방이었다. 자정이 넘어서 연습을 끝내고 우루루 방문을 나서는 순간 발을 헛디딘 친구가 마당까지 나동그라진 것이다.

단순한 탈골이었을 그의 다리는 용하다는 마을 침쟁이의 치료에만 의존하면서 오늘내일 차도를 기다렸지만 통증은 날로 심해져만 갔다. 그 이듬해 결국 부산의 병원에서 청천벽력같은 결단을 요구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왼쪽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꿈 많았던 한 시골초년의 인생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 것이었다.

● 마을사람들 매년 향우회서 애환 나눠

그러나 그 후 친구는 무수한 좌절의 순간을 넘나들며 어려운 역경을 자력으로 이겨냈다. 그는 자기주장을 강요하는 일이 없고 모든 일에 양보하려 하고 밝고 활기차게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는 한 인간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는 고향에서의 악몽을 잊은 듯 유별나게 애향심이 강하다. 용연향우회 결성시 자진해서 총무를 맡아 수년 동안 향우회의 기반을 굳힌 공로자이기도 하다.

장씨는 1967년부터 1998년까지 SK에너지에 근무했다. 여러 부서를 옮겨 다녔지만 자신의 고향집이 철거될 무렵 기초설계를 담당하고 있었고 SK의 50만 배럴짜리 원유저장 탱크를 설계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은 바로 자신이 설계한 탱크가 자신의 생가 부지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고향을 떠난 용연해안 8개 마을 사람들은 매년 8월 15일 향우회 모임을 갖는다. 그 기원은 이주 전부터 이어지던 해안 8개 마을 체육대회에 있다. 용연시장터에서 배구 한 종목으로 시작한 체육대회는 지금은 여러 종목으로 확대돼 실향의 애환을 나누고 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은 묘한 슬픔에 쌓이도록 합니다. 강원도 두메산골이어도 좋으니 고향마을이 보존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아이들에게 고향을 물려주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이주하고 나서 마을 사람들은 고생이 심했다. 이주 후에 성공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업과 농업에 길들여진 마을 사람들은 도심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 이주 후 생활 힘들었지만 값진 평가

그러나 장씨는 당대에는 힘들었지만 자손들에게 일찍부터 교육여건이 좋은 도시생활을 시작하게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점도 있다고 말한다.

“고향 마을에서 그냥 살았더라면 자녀들이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혜택도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주 세대는 힘이 들었지만 후손들이 일찌감치 울산 도회에 진출해서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또 자신의 고향집을 내주는 아픔이 국가 산업발전의 밀알이 됐다는 점에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누군가가 희생해야 할 일이었다면 자신들의 희생이 값진 것으로 평가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지난 처용문화제 때 장정국씨는 처용제의가 치러진 처용암 앞에서 ‘해안 이주민 만남의 장’을 주선했다. 용잠, 남화, 용연, 황암, 성외, 세죽, 성암, 내해마을의 주민들 300여명이 모여 정담을 나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울산의 발전에 자신들의 희생이 씨앗이 됐다며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50년 전 공업센터가 지정되고 난 후 가장 큰 변화를 겪었던 곳이 바로 남구 대현면 쪽이다. 95% 이상의 주민들이 고향집을 떠났고 지금은 거주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이주민들은 모두 저와 같이 고향을 잊지 못할 겁니다. 삶이 고단할 때면 고향 마을 주변으로 가서 통곡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고향에 대한 추억은 가슴에 담아두고 발전하는 울산의 모습에 보람을 갖고 살아갑니다.”

울산에서 공단 조성으로 삶터를 내준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망향비에 새기고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상문 기자 iou@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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