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문 반성하고 암각화 가치 진중히 생각해야
물고문 반성하고 암각화 가치 진중히 생각해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1.2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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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문명화 과정 한눈에

대곡리 암각화. 지금부터 40년 전에 한반도의 동남쪽 끝 울산에서 발견된 이 암각화는 이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암각화이자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의 선사 학계는 이 암각화를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암각화 속에 그려진 10여 종 60여마리의 고래와 두 척의 배가 협력을 하여 고래를 잡으려는 장면, 뱃머리에 서서 작살을 던지려는 작살자비, 그물, 잡은 고래를 끌고 가는 배 등이 인류의 본격적인 고래잡이 개시에 관한 가장 이르고 또 명백한 기록이자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 암각화는 인류가 이룩한 가장 이른 시기의 고래잡이 해양문화의 원형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암각화 속의 형상 하나하나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양식 등을 통해서 제작 주체와 그들이 궁극적으로 표현해 내고자 한 이상과 가치, 그 형상들 속에 반영된 시대상 그리고 조형 매너 등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암각화들이 발견됐고, 또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그것들에 관한 연구는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심층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물론 그와 같은 유적들과 그 속에 그려진 각각의 형상들은 인류가 바라본 당대의 자연 경관 및 탈 자연화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창출된 부산물들이며, 그림 가운데 제시된 일련의 이미지들은 인류가 걸어온 더디고 긴 문명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의 그림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지금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해당 지역에서 살지 않는 동물들을 살필 수 있고, 그것들을 사냥하기 위해 펼쳤던 갖가지 시도와 방법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물의 가축화와 축력의 이용 그리고 마침내 인공구조물이 등장하는 과정 등이 그림 언어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 형상 하나하나 속에는 제작자들이 품었던 이데아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시도된 방법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서 익히 알려진 것처럼, 시베리아의 오지 말타와 부레트 유적의 주인공들은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매머드를 사냥하면서 살았다. 알타이 산맥 인근의 바위그림 유적지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사냥했던 매머드와 코끼리 그리고 타조 등이 그려져 있다. 그것들은 이제 오직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이나 고고 유적 가운데서만 살필 수 있지만, 분명히 이들은 한 때 이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보다 늦은 시기의 암각화 속에서 우리들은 사람들이 고삐를 매어 거대한 동물을 끌고 가거나 혹은 그것을 사냥하려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활과 창에 이어서 도끼를 든 사람과 마차 그리고 창기병과 개마무사 등도 등장하는데, 이로써 사회가 급속히 분화됐고 또 계급화 됐으며, 지역 및 민족 간의 투쟁이 심화됐음도 살펴낼 수 있고, 동시에 그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과 순기능 등이 동시에 교차됐음도 읽어낼 수 있다.

● 세계 위대 문화유산 자리매김

일부 바위그림 속에는 육지동물뿐만 아니라 바다를 무대로 삼아 바다동물을 사냥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도 그려져 있다. 남아프리카의 몇몇 바위그림 유적지에서는 물고기를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바위그림 유적지에서는 고래가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카렐리야 그리고 베링 등지의 암각화 유적지에는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카렐리야의 노바야 잘라부르가 암각화 유적에서는 여러 명의 어부들이 탄 배가 고래를 포획한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베링의 페그트이멜 암각화 가운데서는 카약을 탄 어부가 고래를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몇몇 유적에서도 고래를 잡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고래잡이 장면은 다양한 제작 방식에 따라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일본의 홋카이도 네무로시 벤텐지마 패총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바늘통에도 작살자비가 고래를 잡으려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아메리카 태평양 북서연안의 누트카족도 모자를 비롯한 각종 장식의 주요 모티프가 고래잡이 장면이다.

베링해협 축치 반도 인근에서 고래와 바다사자 등을 잡으며 사는 축치족도 바다사자의 이빨에 고래잡이 장면을 그려놓았다. 그 이후 비스케 항이나 북극해의 스피츠베르겐 섬의 고래잡이 바스크 족과 그들의 고용주들, 일본의 타이지나 인도네시아의 라마렐라 등지의 고래잡이 어부들은 온갖 방식으로 고래잡이 장면을 그려놓았는데, 그것들도 모두 뱃머리에서 작살을 든 어부가 고래를 향해 작살을 내다꽂으려는 모습이다.

이렇듯 작살자비를 태운 배가 고래를 잡는 장면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의 가장 고형을 추적하다보면, 그 최종의 귀착지가 바로 대곡리 암각화이다.

예로부터 고래들이 회유하는 이동경로 주변에 거주했던 여러 민족들이 이른 시기부터 고래를 잡았던 각종 그림들을 남겨두었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유적과 그림 가운데서 가장 고형은 대곡리 암각화 속의 그것이다. 고래잡이 장면을 남긴 유적이나 그림의 제작연대를 추적하다 보면, 그 최종 귀착지에서 대곡리 암각화를 만나게 되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그려진 유사 그림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대곡리 암각화 속의 고래잡이 장면은 세계 각지에 그려진 포경도의 시원 형이자 오리지널인 것이다.

● 수몰사태 미해결로 가치 제대로 못밝혀

그런데 우리들은 세계의 문명사, 그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포경업 발상지인 대곡리 암각화의 가치에 대하여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암각화는 수몰 상태에서 발견됐으며, 그리고 그로부터 40년이 경과되는 동안 우리들은 그 상황을 원래대로 바꾸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 암각화가 지닌 문명사적 가치를 제대로 밝히지도 못한 채 보존을 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익집단이 등장했고, 암각화는 그들로 인해 이제 만신창이가 됐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화 과정의 코드를 간직하고 있는 이 암각화는 이제 감동적이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피로감만 안겨주고 있다. 도처에 세워진 모조품들이 귀하디귀한 암각화를 싸구려로 만들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새롭게 짓는 건물마다 이 암각화 속의 도상들이 도배되고 있다. 이제 암각화는 더 이상 신비롭지도 신성하지도 않다. 그래서 그런지 수많은 개발찬성론자들이 주변지역의 유로 및 경관 변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하고 있고, 행정당국은 물 핑계로 국보에 물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천덕꾸러기 대곡리 암각화! 지난 40년 동안 무지와 무개념 문화재 보호 및 보존 정책으로 인해 처참한 몰골을 한 채 우리 앞에서 신음하고 있다.

국제 암각화 학계의 저명한 학자들은 지금의 상태대로 유네스코 등재를 논하는 것은 코메디 같은 일이라고 서슴없이 비판한다. 또한 대중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보존이라면 그것을 굳이 왜 하느냐고 반문한다.

대곡리 암각화는 이제 더 이상 울산의 암각화도 아니고 한국의 암각화도 아니다. 그것은 세계인의 암각화인 것이다.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문화사적 무게만큼이나 우리들도 그것을 진중하게 생각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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