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꺼지지 않는 플레어 스택 ‘불꽃’
‘희생의 세대’가 물려준 소중한 자산
365일 꺼지지 않는 플레어 스택 ‘불꽃’
‘희생의 세대’가 물려준 소중한 자산
  • 권승혁 기자
  • 승인 2012.11.20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근 前 대한석유공사 사업개발부문장
▲ 1967년 11월 유공 정유공장과 부두 전경, 現 SK에너지(주).
플레어 스택(Flare Stack·배출가스 연소탑)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공업화의 상징이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2년 2월 3일 울산 공업센터 기공식에서 읽은 치사문에서 언급한 “제2차 산업의 우렁찬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산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이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대목이 현실화 된 것이다.

플레어 스택의 불꽃이 꺼진다는 건 공정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였다. 불꽃이 작아져서도 안 되고 더 커져서도 안됐다.

대한석유화학공사(유공, 현 SK에너지) 시절 20대의 이영근씨에게 이 불꽃은 마음의 안정을 주는 존재다.

그의 나이는 이미 일흔에 가까워졌다. 30여년간 동고동락한 플레어 스택의 불꽃을 공업센터 50주년을 맞아 다시금 떠올렸다.

“플레어 스택의 불꽃은 정유공장의 심벌이었습니다. 지금은 연소탑 자체에 대한 환경오염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선입견 때문에 불꽃의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산업화 초기 근로자들은 어쩌다 밤에 소주를 한 잔 기울일 때도 본능적으로 멀리서 번쩍이는 플레어 스택의 불꽃을 보며 안심을 하곤 했죠. 공장이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돌아갔거든요. 불꽃은 ‘공장이 잘 돌아가고 있구나’ 그런 뜻이었습니다.”

● 유공 근무는 엘리트 자긍심 대단

이씨는 1970년 2월 유공에 엔지니어 기사로 입사했다. 이공계를 나온 이씨에게 새로 생긴 정유공장은 매력적인 직업으로 여겨졌다. 대우도 단연 최고였다.

우리나라가 농업에서 공업화로 가는 초창기, 정부의 경제개발 2차년 계획에 의해 하나의 효시로서 정유공장이 세워졌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투자기관을 찾기 어려워 외국계 메이저 기업인 까르푸와 정부가 절반씩 투자해 1962년 7월 반국영기업체인 유공을 설립했다.

유공은 설립 이후 10년 이상 대한민국 전체 기업체 중 매출액 ‘넘버 1’을 기록하며 법인세를 가장 많이 내는 회사로도 화제가 됐다.

“울산에서 유공에 다닌다고 하면 굉장히 엘리트사원으로서 자긍심이 높았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게 하나의 대중적 목표였고, 여기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게 외국계회사였으며, 그 선두에 유공이 있었지요.”

절반은 외국계 회사인 유공에서 입사 초기 가장 곤혹스러웠던 부분은 뭘까.

“문제는 영어였죠. 사장을 제외하곤 경영진 대부분이 미국인이었습니다. 당연히 공문서도 영어로 썼지요. 입사 초기에는 영어로 공문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 스트레스도 받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저절로 해결되더군요.”

유공의 기업문화는 기존 국내기업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최고경영자의 호불호에 따라 직원 전체가 주관 없이 쏠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까르푸식 경영’, 소위 미국식 문화가 경영 전반에 걸쳐 반영된 탓이다.

“국내 대부분의 기업이 경영진의 토속적 카리스마로 움직이는 기업이라면, 유공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의 경영문화가 일찌감치 자리 잡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 생활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는 가연성 탱크에 붙은 노즐이 떨어지면서 난 불이 볼탱크 주위로 번진 겁니다. 가연성 볼탱크들이 줄줄이 서 있는데, 불길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화재 진압 요원들도 탱크 주위로 불길이 치솟아 감히 다가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아! 이거 폭발이구나’ 직원들의 머릿속에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인근 부곡동 주민들도 환자까지 둘러 업고 대피하기 시작했다. 불길은 자꾸만 커졌고 ‘이제 회사가 망하는구나. 정말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공장 폭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울산 공단과 도시 전체가 입을 피해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다들 도피하느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찌된 영문인지 불길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최종현 회장이 ‘하늘이 도왔다’고 할 정도였다. 모든 게 첫 경험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사고 이후의 처리과정이 순조롭게 될 리 만무했다. 늘 실수와 사고를 통해 대처능력을 키우고 안전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유화업계에 종사하는 후배들에게 늘 조언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장점 중 하나는 순발력입니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이른 바 ‘2등 전략’을 통해 성장해 왔지요. 쉽게 말해 1등의 것을 보고 베껴 더욱 싸고 잘 만들어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는 얘깁니다. 문제는 이러한 순발력이 잘못 발휘되는 게 일종의 ‘요령’입니다. 산업재해도 대부분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이런 요령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규정은 수두룩하게 만들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습니다. 유화업종처럼 자칫 대형 인명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 기업에 근무하는 이들이라면 늘 원칙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 부모세대 소명의식 배워야

그는 울산 공업센터 지정 50주년을 맞아 현재의 시민과 기업인, 근로자들이 ‘희생의 세대’에게서 소명의식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산 공업화를 일군 희생 세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울산은 있을 수 없겠지요. 요즘 청년들은 공업화 반세기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희생을 간과한 채 풍요를 누리기에 급급합니다. 어느 시대나 국민의 정신이 나태해지는 순간, 부정부패가 창궐하고 국력은 쇠퇴합니다. 집안이 잘 되려면 후손이 잘 돼야 하듯, 지금의 풍요를 누리기보다 자신의 위치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권승혁 기자 gsh@ujeil.com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