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서 쌓아올린 국내 첫 정유공장
맨땅에서 쌓아올린 국내 첫 정유공장
  • 권승혁 기자
  • 승인 2012.11.13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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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용 前 한국석유공사 안전·운영부장
▲ 성기용 前 한국석유공사 안전, 운영부잗.

“주어진 임무는 정유공장 건설에 참여하라는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유공장이 도대체 무엇을 만드는 공장인지도 몰랐다는 겁니다.”

1963년 3월 1일. 육군본부에서 사병이었던 성기용(73)씨는 군에서 제대후 울산정유공장으로 발령받았다. 지금의 울산정유공장이 자리잡은 울산시 고사동 110번지는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울산군 대현면 고사리였다. 고사리는 옹기종기 모인 20여 채의 초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40여 채의 초가가 흩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공장 건너편으로는 합승 미니버스가 하루 1~2회 정도 왕래할 뿐이었다. 오히려 짐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삐걱거리면서 다니는 모습이 익숙한 시절이었다.

당시 공장부지 일대에는 대현국민학교 건물이 철거 중이었다. 공장건설 회사였던 미국 후로아(FLOUR) 회사는 각종 중장비를 투입해 일일처리능력 3만5천 배럴의 정유시설을 짓기 위해 기초작업을 벌이는 한편 탱크 건설지역에 정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지키던 구 조선석유 정유공장 시설은 이미 해풍에 시달린 채 쓸모없는 고철이 되어 공장 한 켠에 쌓여 있었다.

“울산 도심에서 공장건설 현장으로 들어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구 울산교를 건너, 삼산들판을 지나 옛 비행장과 여천 채석장, 그리고 여천 배밭들을 쭉 통과하면 장생포역 철로를 건너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은 당시 여천, 용잠, 용연 등지로 연결된 길로 공장 중심부를 가로질렀지요. 길이 하나밖에 없다보니 곳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습니다.”

● 공업용수 부족 시달리며 동분서주

▲ 울산정유공장에서 근무중인 젊은 시절의 성기용씨.

먼저 건설현장에 가장 중요한 공업용수에 문제가 생겼다. 정유공장 건설현장은 여천고개 옆 삼양사 전용 정수장에서 임시로 만든 6인치 송수관을 통해 공업용수를 끌어왔다. 이 송수관은 공장내 도로와 맞닿아 있어 건설현장에 투입된 수백 대의 자재운반차량들이 도로를 달리다 자주 급수관과 부딪혀 물난리를 겪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공사작업은 중단됐고, 송수관을 보수하는데 많은 인원이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날이 가물때 자재운반 차량이 수없이 지나가면 도로변에는 먼지가 5cm이상 수북이 쌓였습니다. 비가 오기라도 하면 길은 곤죽탕이 되어 난리도 아니었죠. 장화 없이는 촌보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내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속어가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1963년 유달리 초봄부터 자주 비바람이 몰아쳤다. 인부들은 건설구조물을 세우기 위해 진흙을 온종일 퍼내야만 했고, 아예 흙을 다 퍼내고 모래와 자갈로 채우는 고된 날이 반복됐다. “한 7월쯤이었나. 비를 머금은 태풍이 불어 닥친 탓에 공장건설 부지가 모두 물바다가 됐습니다. 새벽 6시쯤 합숙소에서 자고 나와 보니 건설사무소가 온 데 간 데 없는 겁니다. 태풍에 2층짜리 가설 건축물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거예요. 공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도 못할 겁니다.”

“지금 여천동 일대에 드문드문 농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근로자들이 잘 곳을 찾지 못해 손바닥만 한 방에 10여 명씩 합숙을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헛간을 임시 방으로 개조해 묵기도 했죠. 엎친 데 덮친 격인지, 우물은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근로자들까지 입을 보태니 마을에 식수난이 왔지 뭡니까. 아낙네들이 마실 물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 밤낮 잊은채 피땀흘리며 노력

▲ 옹아일보 1964년 5월 8일자 울산정유공장 관련기사.

공장 건설 근로자들은 낮과 밤을 잊은 채 공기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전국 각지에서 몰린 이들은 힘들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소주 한 잔에 고단함을 잊곤 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일을 마치고 편하게 맥주 한 잔 마실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건설현장 인근에 상인들이 천막을 두 개 설치했는데, 하나는 구멍가게이자 대포집이었고, 하나는 간이식당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 텐트에서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가족들의 이야기,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서로 털어놓으며 마음의 위안을 삼곤 했지요. 그 천막이 노동자들에겐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그 간이식당에서 한 달 동안 삼시 세끼를 먹어도 1천250원만 내면 됐습니다. 실로 꿈같은 이야기지요.”

그 숱한 어려움을 견딘 지 6개월여 지난 9월 중순. 공장 지역과 탱크저장지역, 직원 숙소 등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정부의 역점사업으로 전국적 관심을 받던 정유공장이 윤곽을 드러냈다는 소식에 정부 요인과 관광객들이 몰려와 너도나도 견학을 요청했다.

“아직 공장이 다 완공된 것도 아니었지만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정유공장을 구경하려고 몰렸습니다. 참 바쁜 시간이었지만 건설 소장은 그 와중에도 구경꾼들에게 직원 숙소를 당시 서울 조선호텔에, 원유저장탱크는 장춘 체육관에 비교하며 설명하곤 했지요. 그러면 어김없이 구경꾼들 사이에서 ‘우와~’하고 탄성이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 플레어 스택 불꽃은 희망이자 보람

1964년 5월 7일 국내 1호 정유공장이 비로소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공사기간이 예정보다 두 달이나 단축됐다. 공장 건설 근로자들의 고된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알리듯 ‘플레어 스택(Flare Stack·배출가스 연소탑)’의 굴뚝에 불꽃이 점화됐다.

울산은 온통 축제분위기에서 성대한 준공식을 열었다. 이 준공식은 매스컴에 의해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서울 세종로에는 대형 축하 아치가 세워졌다.

“그야말로 범국민적인 격찬이었고 감동이었습니다. 울산이 온통 축제 분위기였죠. 플레어 스택의 불꽃은 선구자의 성화처럼 울산 누리를 밝혔습니다. 눈시울을 붉힌 근로자들이 ‘고생했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놓질 못했지요.” 권승혁 기자 gsh@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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