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배 건조한 백발의 엔지니어
최초의 배 건조한 백발의 엔지니어
  • 권승혁 기자
  • 승인 2012.11.0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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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조 現 현대중공업 퇴직자 협의회장
▲ 서남조 現 현대중공업 퇴직자 협의회장.

집채만한 철판이 휘어지거나 잘려나갔다. 그 소리가 뙤약볕 사이로 허공을 갈랐다. “꽝! 꽝!” 울산 동편 드넓은 미포만이 요란한 쇳소리로 가득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해 9월 현대중공업 1도크에 들어선 서남조(71)씨의 시선은 지긋이 제 모습을 갖춰가는 벌크선을 응시했다.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지만 눈빛은 매서웠고 아직도 팔을 걷어붙이면 그 큰 철판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수십만 산업역군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일터’이자 ‘삶터’인 그 곳 현대중공업. 작은 못 하나에서부터 굵은 로프에 이르기까지 서씨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울산공업센터 지정 50주년을 앞두고 만난 서씨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일류가 됐다. 현대중공업은 우리 모두의 긍지요, 울산은 내 가족의 평생 쉼터가 됐다”고 말했다.

서씨가 현대중공업과 인연을 맺은 때는 1973년 6월 초여름이었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태동기에 그 현장에 있었고 어느덧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굳은살 박힌 투박한 손은 야윈 대신, 가지런히 넘긴 회백색 머리에 세월의 멋을 담았다. 이제 고희를 넘긴 그에게 ‘1973년의 여름’은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서씨가 조선업에 발을 디딘 건 사실 ‘조선공사(조공)’ 부터였다. 조공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배를 만드는 곳이었다. 서씨는 “월급 수준이 높다보니, 딸 가진 부모들은 누구나 조공 직원을 사위로 삼고 싶어 했다”고 회상했다.

1972년 마침 울산에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의 전신)가 설립됐다. 서씨가 조공 선거부에 몸 담은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현대조선소는 조공 직원에 한해 ‘시험 면제’라는 우대조건을 내걸었고, 두 회사 간에 본격적인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전국에 조선업 유경험자는 조공 직원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공은 긴장했다. 이런 저런 말로 회유도 하고 협박도 했다. 당시 현대조선소의 면접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조공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일부러 직원들에게 특근을 시키기도 했다.

현대조선소는 도크를 만들고 어느 정도 조선소의 모습을 갖춰갔지만, 진수요원을 확보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현대조선소는 공장 건립과 배 제조 작업이 동시에 이뤄지는 상황이었다. 한쪽에서는 건물이 올라가고 한쪽에서는 이미 무쇠조각을 자르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결국 현대조선소는 조공으로 협조 요청을 보냈다. 인원을 빼가지 않는 조건으로 조공은 서씨를 포함해 15명의 진수요원을 현대조선소에 파견했다. 서씨는 우여곡절 끝에 1, 2호선의 진수를 마쳤고 1973년 현대조선소에 남기로 결심했다. 당시 회사가 창립 과정에서 제대로 된 틀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훗날 세계 일류 조선소가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서씨의 예감이 적중한 셈이다.

● 회사서 생활하며 열정·노력 올인

“초기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여름철에는 갑판에 계란을 깨면 반 프라이가 될 정도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료들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초대형 선박을 건조했고, 힘들 때마다 형, 동생처럼 의지하며 일했습니다. 동료와의 끈끈한 우애와 특히 조선소의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했다는 뿌듯함이 결국 현대맨으로 남게 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서씨는 입사와 동시에 회사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사내 숙소에 안전화를 신은 채 잠들었다가 회사에 바로 출근하는 경우도 잦았다. 당시로서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한 달 근무시간은 무려 600~700시간에 육박했다. 첫 월급으로 1만6천원을 받았다. 조공에서는 잔업을 포함해 1만원을 받기 힘든 시절이었다. 일에 대한 보람에다 충분한 월급까지 주어졌으니 현대조선을 택한 것이 참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근로자들은 대부분 철판을 만드는 작업에 투입됐다. 그러나 배를 만드는 핵심설비인 와이어로프는 녹이 쓸거나 제대로 만들지 못해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씨는 와이어로프를 만드는 전천후 공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곧장 공무부장을 찾았다. 공무부장은 고(故) 정주영 회장의 측근으로 서씨의 부지런함과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터였다. 공무부장은 정 회장에게 서씨의 제안을 보고한 뒤 로프 등을 만드는 선구(船具)공장을 세워 서씨에게 맡겼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와이어로프 제조공장을 만들면서 현대조선소가 본격적으로 선박회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우리 공장 작업자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회사에 보답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바지크레인을 미국에 인도하는 등 사내에서도 인정받아 큰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열정, 성과 모두 굉장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30년 가까운 근무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현대조선소 1호 선박인 아틀랜틱 배런호의 진수식을 꼽았다. 이 배는 그리스 선박왕 리바노스가 주문한 것으로, 선박 규모만 36만t급, 축구장 2개 넓이였다.

서씨는 “도크에서 거대한 선박을 꺼내려니 막막함 그 자체였다. 인력, 장비 모두 절대 부족이었다. 조선소는 번듯한 예인선 1척을 구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고 전했다.

결국 회사는 일본 선주사에 첫 26만t 진수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다. 울산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도크와 암벽 등을 둘러보더니 “이 상태로는 큰 배를 진수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돌아가 버렸다. 고심 끝에 부산의 유명한 한 해양장에게 다급히 구호의 손길을 뻗었다.

● 현중 1호 선박 진수식 최고 추억

▲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한 1호선 초대형 유조선에 명명중인 故 육영수 영부인.(1974년 6월 28일)

이후 진수작업은 대부분 인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선수에 12명, 선미에 120명, 육상 도크 등에 모두 500여명이 거대 선적을 바다로 끌어내기 위해 포진했다. 부산해양항만청에서 예인선을 빌렸고, 지게차도 곳곳에서 끌어왔다. 굵은 로프를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잡아당겼다. 그렇게 한 2, 3일 지났을까.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태산 같던 배가 서서히 바다로 제 몸을 싣고 있었다. 근로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선번 7천301호. 현대조선소가 만든 첫 배였다. 이날 수만 명의 직원과 주민이 성대한 진수식을 치렀고, 회사는 돼지 400마리를 잡았다.

서씨는 현재 현대중공업 퇴직자 협의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퇴직자 협의회(회원 400여명) 사무실이 위치한 울산시 동구 곽전관 1동에는 요즘도 백발이 성성한 현대맨들이 모여 추억담을 나눈다.

서씨는 “울산이 이렇게까지 발전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현대중공업이 있기까지, 그리고 울산이 있기까지 작은 도움이나마 됐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모든 현대맨들이 그렇듯, 나도 영원한 현대맨으로 남고 싶다. 울산의 발전은 무궁무진할 것이다”고 말했다.

현재 서씨의 장성한 아들이 대를 이어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일본 동경 지사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현대중공업의 또 다른 반세기의 역사를 쓰고 있다. 권승혁 기자 gsh@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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