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조형유물을 보며 16 신상(神像)조각 ②
신라의 조형유물을 보며 16 신상(神像)조각 ②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5.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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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인간의 대책의식은 본능적으로 생겼으나 의식주는 생활방법의 변수로 작용했다.

암각화나 동굴벽화는 주거지가 해변이나 산중생활의 흔적 기록이다. 그런데 진화상 바다에서부터 육지생물이 생성했다고 보면 평원이나 산중보다 해변의 생활이 선험적임을 알 수 있고, 먹이에 따라 점차 산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도 왼편에 강과 바다동물이 먼저 면각(面角)되었고, 오른편의 육상동물은 그 후에 선각(線刻)되었다. 서양 조각사는 다산 기원의 빌렌도르프 비너스 조각상을 서두로한다. 그러나 1만년 전에 구석기의 타제도구로 높이 11cm 에 불과한 소품을 그토록 정교하게 쪼아낼 수 있을까?

선사인은 지구 사방에 분포했고 그 솜씨와 지능의 편차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의 마제도구로 쪼아낸 반구대 암각화가 구석기의 비너스 조각 보다도 거친 솜씨일진데 암각화 제작 시기를 6천년 전으로 추측한다면 모순이라는 의구심도 생긴다. 물론 지역과 인종에 따라 선사의 시대구분이 차이날 수 있을 것이며. 고래사냥에 쓰인 배나 작살과 그물로 추측하는 도구 때문에 6천년 전의 신석기라고 추정한다면 단군에서부터 시작되는 5천년 전의 상고사와는 1천년 차이로서. 그 천년이 짧지만은 않다고 감안 하더러도 그러하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반구대 암각화가 알타미라 동굴벽화보다 먼저라고 생각도 되어서 이 부분의 과학적 연구와 확증도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과학적 확증은 다른 과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7번국도 경주와 울산 간의 시(市) 경계지점에 세워진 한 때 표지물의 홍보문구 ‘문화와 산업도시 울산’보다는 ‘산업수도 울산’, 장생포의 ‘생태도시 울산’이라는 현재의 문구가 오히려 설득력 있고 동감된다.

강이나 해변이 육지와 산의 선사생활보다 먼저일 것이지만 반구대는 이 두 도시 간의 지점이고, 먼 옛적에는 수중과 육지로 번갈아 변동되었을 것이며, 마침내 지금과 같이 이 두 도시가 해안에 점철된 육지가 되었을 것이다. 깊은 산중에 자리한 현재 수중의 반구대 암각화 주위는 울산의 어느 곳보다도 풍광이 뛰어나며, 동시에 원시성도 보여준다.

필자가 반구대암각화에 관한 전문지식도 없이 서술하는 이유가 그러한 암각화동물의 기호적인 추상체에 매료된 조각가이기도 하고, 한편 조각과 깊은 관계의 종교가 여기서부터 발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사인의 생존의식이 극락천당의 영생(永生)으로, 공포의식은 연옥지옥의 업고(業苦)를 앞세우며, 기원의식에서 사랑 평등의 현세(現世)를 갈구하는 것이 종교의 기본 패턴이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한 생존의 여유로 유희본능이 발동해서 암각화나 동굴벽화를 표상할 정도로 동물성을 벗어낫다고는 하지만 천재지변 등으로 인간능력의 한계성에 봉착했을 것이다.

여름날 뙤약볕의 하늘에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동반한 천둥번개가 하늘을 찢고 대지를 내려치는 현상에 누구라도 두려움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 천둥벼락이 전기충전의 물리작용이라는 과학지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도 두려울 진데 하물며 선사인의 느낌은 어떠했겠는가.

‘저 벼락 맞을 놈’은 벼락을 일으키는 어떤 전능한 존재, 즉 신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되질 놈을 응징하길 바라는 심리표현이다. 벼락은 바로 신이고 숭배대상으로서 인간이 호소 의지하고 복종 숭배 하려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숭배, 영혼불멸, 동식물숭배, 무당, 금기형벌, 주술 등의 원시신앙이 생성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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