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도 팔자가 있다?
나무에도 팔자가 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0.2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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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명품 길은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터널’만이 아니었다. 10월 중순, 벌교에서 담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시야를 자극하던 ‘배롱나무 길’도 연신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명품 길의 하나였다. 가지치기로 잘 다듬어놓은 배롱나무는 또 하나의 뿌리치지 못할 유혹이었다.

팔자는 개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갖게 된다. 울산 도심의 간선도로변 화단에 심어놓은 나무(관상수)들을 보노라면 그런 감정이 일곤 한다. 남도 길의 가로수목들이 ‘상팔자’라면 울산 도심의 도로변 나무들은 태생적으로 ‘기구한 팔자’를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한 번만이라도 찬찬히 눈여겨 보라. 길가의 나무들이 내는 신음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신음소리는 필시 사람들의 무관심과 시도 때도 없는 박해가 가져다준 몸살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더도 말고, 울산시청 앞 네거리에서 남구청 네거리에 이르는 가로변을 한 번 살펴보라. 금세 답이 나올 것이다. 사족 삼아, 한 마디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말이 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이 찻길의 이름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이사이 세로로 뻗은 길(路)의 표지판이 구구각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표지판에는 ‘돋질로’도 있고 ‘삼산로’, ‘신정로’도 있다. 시청 앞 네거리 근처 표지판에는 ‘중앙로’란 글씨도 눈에 띈다. 가로명주소가 어려운 일반시민들로서는 헷갈리기만 할 뿐이다.

어른 보폭으로 예닐곱 걸음쯤 되는 이 찻길의 양쪽 화단에는 심기만 하고 제대로 가꾸지 않은 낮은 키의 관상수들이 사열하듯 대오를 이루고 있다. 이름은 익히 알진 못하지만 사철나무와 향나무를 닮은 나무들이 주로 심어져 있고, 그 언저리에는 난을 닮은 맥문동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도로변 화단은 잊히고 버려진 지 오래다. 이발기기로 듬성듬성 뜯어낸 듯 흉물스러운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일회용 컵이나 잡동사니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생활정보지 꽂이대나 자전거 보관대 구실을 하느라 무게에 짓눌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어떤 때는 신발용 발판의 건조대로 둔갑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수북이 쌓아둔 모래더미는 나무의 생육을 단숨에 가로막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눈 닦고 보아도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다. 시의원이나 구의원 누구 하나 질문거리로 들고 나오는 일도 없다. 메마른 시민정서와 번드르르한 전시행정, 말잔치 지방의정의 현주소를 말없이 대변해주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삭막하다 못해 살벌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예술이 숨쉬는 길’을 새로 꾸미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생태도시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주요 간선도로변이 ‘정서가 숨죽인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이 현실을 그대로 놔두고 뒷짐만 지고 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심을 때는 몇 천만 원, 몇 억 원대의 예산을 쏟아 부었겠지만 심은 그때뿐이라는 느낌이 앞서는 것은 왜이며,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화장실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비아냥거림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싶어서인가.

관상수의 생장 상태는 어느 지점에 심어졌는지, 바로 앞 점포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되풀이하는 얘기지만 나무에도 팔자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시청의 햇빛광장이나 문화예술회관의 ‘예술의 숲’이나 달동문화공원, 그리고 남구청 정원의 잘 가꾸어진 수목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마음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올 것만 같다.

‘제15회 교보생명환경대상 후보자 공모’ 포스터의 문구가 새삼 시선을 사로잡는다. “초록별 지구를 위해 생명의 나무를 심는, 가슴 따뜻한 주인공을 찾습니다!” 수상자격도 덩달아 눈길을 끈다. ‘환경교육 발전에 기여한, 창작 및 문화예술 분야에서 생명존엄의 가치를 표현하거나 생태사회의 전망을 제시한, 환경문제의 해결과 지속가능한 사회 실현에 기여한, 환경생태문제 해결을 위해 국제적으로 본받을 만한 활동 업적이 인정되는’ 개인 또는 단체….

모두 그럴싸한 기준이고 그럴듯한 표현이다. 그러나 눈길은 거시적인 곳만 바라보고 있다. 우리 사회를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때론 미시적인 시각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시야를 당장 길가의 나무들로 좁혀보자. 그리하여, 지지리도 기구한 팔자의 나무들로 하여금 한 그루라도 제 대접을 받게 하자. 시민운동도 이런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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