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천사와 바나나
어린 천사와 바나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5.2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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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학교운영위원회 위원 한 분이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아침에 남편 출근하고, 딸을 학교에 보낸 후 설거지, 청소, 빨래와 같은 집안 일은 반나절이면 다 끝난다. 가족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 전까지, 남는 시간 동안 보람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 부녀회에 가입하여 양노원이나 재활원에 나가 자원봉사활동을 다닌다. 이런 활동을 하다보면 간혹 귀가 시간이 늦어 가족들에게 가까운 중국집에 저녁을 시켜먹도록 부탁을 하곤 한다.

내 딸은 초등학교 4학년으로, 마흔이 넘어 얻은 귀염둥이면서 가족 사랑이 유별난 아이다. 부모들이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 항상 궁금해 하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나도 크면 엄마 아빠처럼 착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겠다며 제법 어른스런 말도 한다.

간혹 부부간 다툴 일이 있어도 딸의 눈치가 보여 참거나, 아니면 밖에 나가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하면서 화를 풀고 들어온다. 혹시나 천사같은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염려하는 딸 사랑이 베어나는 부부간 처신법이다.

그 날도 좀 늦게 마칠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저녁은 아빠와 중국집에 먹고 싶은 것 시켜먹어라”는 전화를 하고, 늦게 귀가했다. 만두와 자장면을 시켜먹었는지 빈 그릇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문 밖에 둔 것을 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간단히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현관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중국집 배달하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현관 밖에 내 놓은 그릇 위에 바나나 하나와 쪽지편지가 있어 읽어보니,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어 벨을 눌렀다는 것이다.

“아저씨!

추운 날씨에 배달 다니시느라 수고 많으시죠? 저는 따뜻한 집에서 이렇게 음식을 시켜먹지만, 추운 날씨에 배달하시는 아저씨를 생각하니,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요. 저희 집까지 배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바나나 드시고 힘내세요. 그리고 늦은 시간 배달 다니실 때 다치시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배달 10년을 다니지만 이런 쪽지 편지 받기는 처음입니다. 걸핏하면, ‘왜 이리 늦어요. 굼벵이예요?’, ‘음식 맛이 이게 뭐요?’ ‘밑반찬이 부족하잖아요.’ 온갖 불평(?) 불만만 듣고 다녔는데, 어린 천사의 쪽지 편지를 받고 나니,

이 일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전에는 음식 배달 일은 그저 습관처럼 마지못해 다녔을 뿐인데, 손님들 중에 이렇게 예쁜 마음을 지닌 천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록 남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일이지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직한 사람을 무능한 사람으로 매도하고,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세태에서, 이런 어린 천사들의 몸과 마음이 몰지각한 사람으로 부터 상처받으며 자라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주위를 한 번 쯤은 살펴보아야겠다.

무엇보다도 불량한 청소년이나 또래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또한 가정에서 ‘공부하라!’, ‘이겨라!’, ‘좋은 대학가라! 그래야 출세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압박하는 부모의 그릇된 자녀교육은 마음이 차갑고, 남을 믿지 못하고, 친구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 서로 감사할 줄 알고, 칭찬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은 참 부모로부터 배운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낮은 곳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헤아릴 줄 아는 어린 천사와 같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고, 삶의 현장 곳곳에서 친절과 배려로 인간미 넘치는 향기들이 솔솔 뿜어져 나올 때, 우리나라도 살 만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 웅촌초등학교 정규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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