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공업화 조국 근대화 온몸으로 일궜다
울산 공업화 조국 근대화 온몸으로 일궜다
  • 양희은 기자
  • 승인 2012.09.25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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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증가 따른 연탄공급
유휴노동력 적절 배치 등
공업센터 발전 발판 마련
투자금융주식회사 운영
중소기업 성장 상당 기여
은퇴 후도 울산위해 헌신
▲ 정창화 前울산투자금융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서구 유럽사회가 몇백년에 걸쳐 달성한 산업화를 우리나라는 50년 만에 해냈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울산에서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고스란히 지켜봤기 때문에 그 감격이 남다릅니다. 가난했던 조국이 날로 발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작지만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울산공업지구가 선포되고 곳곳에서 공사가 막 시작될 무렵인 1963년 울산 직업안정소장을 지낸 정창화(80)씨. 그는 울산이 공업지구로 지정되기 얼마 전인 1959년 부산에서 울산으로 왔다. 우리나라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서는 농촌이 잘 살아야 한다는 철학으로 몇몇 지인들과 ‘국토개발공사’를 만들어 동부경남을 맡았던 것이다.

정씨가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 진목마을의 황무지에 피마자를 심어 2만7천여 평의 땅을 개간할 당시의 울산은 아직 조용한 농촌, 어촌에 불과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가 그랬겠지만 울산도 공업이나 산업 따위의 말들이 생소한 때였다.

개간이 이뤄지고 얼마 후 5·16혁명이 일어났고, 국가재건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재건국민운동 울산군지부에서 일할 것을 권유받고, 개간사업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그곳에서 농촌의 청년 지도자들에게 국가관과 농촌 개조에 대한 의지를 심었다. 농로를 만들고 주거지를 개선했다. 훗날 새마을운동의 표준이 되는 일을 그때 이미 했던 것이다.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에도 잠시 몸을 담았다. 1962년 공업지구가 선포되고 울산은 군에서 시로 승격하며 점차 공업도시로 변모해 갔다. 그는 당시 정당에서 나와 공무원이 돼 시 공보계장으로 임명됐다.

정씨는 “조국의 근대화와 울산 공업화의 가장 앞에서 일을 했고, 그 과정을 몸소 느끼고 체험했다”며 당시 울산의 발전 과정을 회상했다.

“태화강 남쪽이 모두 농토고 딸기밭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스피커를 통해 새마을노래를 방송했고, 집 앞 청소 등 계몽운동을 진행하는 것도 내 손을 거쳤습니다. 상공계로 자리를 옮겼을 때만 해도 내가 관리해야 하는 공장은 동네 작은 연탄공장 몇 개가 다였습니다. 삼양사와 조개표 석유공장이 일제 때부터 있었지만 내가 관리할 대상에서는 제외됐습니다.”

▲ 영남화학(주) 조성공사 현장(1964).

공업지구 선포 후 대한석유공사, 영남화학 등이 차례로 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면서 차츰 인구도 늘어났고, 정씨의 업무도 바빠졌다. 인구 증가에 따라 수요가 많아진 연탄을 공급하는데도 문제가 생겨 화차를 배정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직원들이 업무처리가 지연될 때는 손수 처리해 관련자들의 편의를 지원했다.

연탄공급이 제대로 이뤄질 때 쯤 그는 울산시 직업안정소 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로 말하자면 취업지원센터 정도의 기관이다. 직업안정소는 공업센터가 조성되면서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공장이 하나둘 들어선 1963년 말 경 만들어졌다. 시민들의 유휴노동력을 파악해 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의 남구 야음동 홈플러스 인근에 있던 공동묘지가 이장되고, 영남화학의 사택이 들어설 터가 마련됐다. 100여호의 사택을 짓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매일매일 그 사업에 필요한 인력들을 공급했다.

공사 책임자를 찾아가 울산의 인력을 적극 채용해 줄 것을 요구했고 그의 열정적인 노력은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공업센터의 발전 발판을 마련하면서 그는 직업안정소장 일을 마감했다.

“공무원을 그만 두고 난 후부터 울산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었습니다.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이 들어섰고, 중소기업도 많아졌습니다. 도시도 커지고 인구도 늘어나 울산이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소기업들이 차츰 늘어나자 그들의 자금관리를 위한 금융회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됐고, 정부에서는 단기금융업법을 만들었다. 정씨는 공무원을 그만두자마자 울산 상공회의소에서 단기금융업에 관한 업무를 맡았고, 현대중공업과 태광산업이 참여한 울산투자금융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울산투자금융주식회사는 중소기업들의 어음을 할인해 주고, 일반 여신, 수신 업무도 담당했다. 그렇게 시민들로부터 예치된 자금을 기업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회사는 점차 커졌다.

“우리 회사 덕분에 울산의 중소기업 자금이 활발하게 돌아갔습니다. 당시에는 3개월 어음이 대부분이었는데 울산투자금융이 없었다면 중소기업 자금줄이 많이 막혔을 겁니다. 중소기업들이 제자리를 찾아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뿌듯했습니다.”

울산의 근대화와 공업화에서 산업의 역군으로 일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그 중심에 있었다. 텅빈 들판을 보고 개간을 하기 위해 찾아 정착한 울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일을 하려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하나 둘 생겨나는 공장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자금의 흐름을 도왔다.

울산읍에서 시로, 그리고 광역시가 됐다. 공업센터 지정 후에는 주변 자연환경도 생태도, 생활환경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던 장생포 항구 일원의 배 과수원들은 공단지역이 됐고, 고기잡이가 번성하던 어촌의 해안마을에도 공장이 들어섰다.

▲ 울산컨트리클럽 개장(1988.6.26)

정씨는 울산 변화의 단면을 간단한 일화를 통해 소개했다.

울산투자금융주식회사에서 일 할 무렵에는 지금 현대자동차가 들어선 염포동 지역에 민물장어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점심 때면 지역 인사들과 시내에서 염포로 점심식사를 하러 더러 가곤 했었는데, 현대자동차가 자리를 잡고 회사 부지를 넓히면서 유명한 장어집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장어가 잡히지도 않았다. 지금이야 그곳 어디에서 장어를 잡을 수 있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곳의 환경이 바뀌어 민물장어의 맛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근대 산업화의 이면에 숨겨진 그늘이 보이는 듯도 했다.

정씨는 “내가 조금씩 성장하면서 울산도 발전하고 자랐으며, 울산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도 잔뼈가 굵어졌다”며 “공업지구 선포 당시의 모습부터 지금까지의 변화 모습이 모두 생생하게 가슴 속에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처음 울산에 발을 디딜 당시를 잊지 못한다. 땅을 개간해 농촌을 발전시키겠다는 그의 다짐과 노력은 애초의 목표를 넘어서 근대화와 산업화의 밑거름으로 쓰였다.

요즘도 그는 울산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에게 물어오는 사람들도 많다.

모든 일에서 은퇴를 하고 나서도 지역발전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았다. 새로 설립된 문화단체의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최근 울산시가 미래의 울산은 창조도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했다. 그리고 하나 둘 결실을 맺어가고 있고 새로운 문화도시 울산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양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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