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적 관성(認知的 慣性)
인지적 관성(認知的 慣性)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5.2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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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서 통나무를 굴리면 처음에는 천천히 구르다가 가속도가 붙으면 더 빨리, 계속해서 언덕 아래까지 내려간다. 계속 굴러가버리는 이 성질을 말할 때, 통나무에 구르는 관성이 생겼다고 한다. 물론 정지해 있을 때도 그대로 있으려는 성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생각하는 모습, 인지적 활동에 적용하면 여러 가지를 이해하게 된다.

사무실에서 우리 팀에게 어떤 프로젝트가 주어졌을 때,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을 갖고 있는 사원은 안 되는 이유만 찾아 그 일에서 빠지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가만히 있으면서 세월만 가라고 한숨짓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인지적 관성은 머리 쓰기를 싫어하는, 잠자는 머리이다.

대학에서 머리를 운동시켜 연구하고 이것을 글로 써서 발표하는 일, 인지적 활동을 싫어하는 교수는 잠자는 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수도 한 가지에서는 움직이는 인지적 관성을 보일 때가 있다.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 일에는 빨리 계산하고 전략을 세우는 인지적 관성이다. 서울 가는 일반 고속버스는 언제 있으며, 우등보다 요금이 얼마나 싼지 잘 계산한다.

아울러 자기가 믿는 특정 종교의 교리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록 모순되는 내용이 있어도 일찍부터 익혀온, 즉 관성이 붙은 쪽으로만 굳세게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관성이 붙은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인지적 관성은 노인들의 핸드폰 사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형이 나와서 자식들이 효도를 하려고 해도 새 것을 싫어한다. 인지적 관성 때문에 옛 것을 그대로 쓰기가 새로운 기능을 익히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리모트 컨트롤도 그렇고, 전화기 응답기능도 그렇고, 새로운 카메라 기능도 그렇다. 옛 것에 관성이 붙어서 쉽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는 힘이 들고 그래서 싫은 것이다. 보수적이다.

창의성은 바로 이런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익혀 온 생각의 버릇, 인지적 관성을 깨트리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종교적인 믿음을 유치한 미신’이라고 한 편지 내용에서 당시(1950년대)의 종교적 인지적 관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지금도 미국은 기독교의 인지적 관성에서 볼 때 창조론에 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은 약 4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당시는 더 낮은 비율이었을 것이다.

인지적 관성에서 혼동해서는 안될 사항이 윤리(倫理)이다. 윤리적인 태도는 인간만이 지녀야 할 여러 행동을 잘 따르고 있나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 아무리 습관화 되어 있어도 이것을 인지적 관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교수는 교직 윤리로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 인지적 관성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지적 관성으로 계속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뇌의 신경세포 운동이 많아져 치매의 예방에도 도움을 줄 것 같다.

예로서 피아노 연주자, 프로 바둑 기사, 작가들은 인지적 관성으로 머리가 항상 운동하고 있어 치매환자가 적은 것 같다.

잠자는 머리의 관성은 그만큼 그 사람을 쉽게 늙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몸뿐만 아니라 머리 쓰기 운동도 함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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